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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05
한자 救國-義兵
영어의미역 The Light of National Salvation, The Righteous Arm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개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일제는 다음 해인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친일 내각을 앞세워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단발령을 시행하여 국민적 분노를 샀는데, 그것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저명한 성리학자 유중교(柳重敎)가 강학하던 제천의 장담서사(長潭書社)에는 유중교의 학문을 이어받은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모여 대의에 대하여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그들은 급박한 현실에 직면하여, 의병을 일으켜 직접적인 대항을 할 것인지 혹은 망명을 하여 외부에서 항쟁을 할 것인지, 외세의 침략에 항의하는 의미로 자결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의를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처변삼사(處變三事)’라 일컬었다.

이렇듯 제천 지역에서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호좌의진(湖左義陣)이 봉기한 이래 1905년 원용팔(元容八)·정운경(鄭雲慶)의 을사 의병, 1907년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이강년(李康秊)을 중심으로 봉기한 정미 의병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의병 활동이 지속되었다.

[호좌의진으로 보는 을미 의병의 활약상]

친일로 돌아선 제천 군수 김익진(金益珍)이 단발을 재촉하는 가운데 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伯善) 등, 지평의 포군들로 이뤄진 의병 부대가 제천으로 달려왔다. 이에 장담의 선비들이 나아가 맞았으며, 젊은 선비들은 그 자리에서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의병대는 장담 출신의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내세우고 진용을 새로이 하여 스스로를 제천의진이라 일컬었다. 제천의진은 단양의 장회 골짜기에서 크게 승리했으나 급속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평 출신의 포군들이 지평 군수 맹영재의 사주를 받고 이탈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의병대는 영월에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유중교 사후 장담의 선비들을 이끌었던, 의병 지도부의 선배이기도 한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면모를 일신한 것이다. 제천을 비롯한 이웃 고을에서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이 부대는 호좌의진이라 이름 하게 되는데, 이후 제천 의병은 호좌의진의 깃발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제천 의병은 단양 군수와 청풍 군수 등 친일적인 관료들을 처단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충주성까지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으며, 그 과정에서 충주 관찰사를 처단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충청남도 지역과 영남 쪽으로는 이범직(李範稷)서상렬(徐相烈) 같은 명망 있는 이들을 파견하여 연대를 도모하였다. 특히 영남에 간 서상렬은 영남 일곱 고을의 의진을 결속시켜 일본군이 주둔하던 상주의 태봉을 공격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서상렬은 일제에 대항하기를 머뭇거리는 의성 군수와 예천 군수의 목을 베었다. 목천에 간 이범직은 천안 군수까지도 죄를 물어 죽이게 된다. 흔히 ‘3관찰 6군수’를 베었다고 일컬어지는 호좌의진의 이와 같은 비타협적 투쟁 노선은 친일 관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충주 관찰부를 점령하여 명성을 떨치던 호좌의진은 공격해 들어오는 일본 정규군의 공세에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퇴각했으나, 그 와중에서도 주변의 열 개 남짓한 고을을 해방구로 만들고 기세를 올렸다. 의병대는 각 고을에 지방관을 대신하여 수성장(守城將)을 임명하여 물자 징발과 의병 모집을 돕도록 하였다.

그러자 다른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이들도 호좌의진의 명성을 듣고 제천 지역으로 달려옴으로써 호좌의진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대규모 연합 의진의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호좌의진은 수안보와 가흥 등 일제가 보호하고자 한 통신선을 지키는 일제 병참 기지를 끊임없이 공격하며 명성을 떨쳤다.

한편, 정부는 아관파천과 친일 내각 수립을 계기로 의병 부대를 해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의진들은 해산했지만 호좌의진은 관군을 이끌고 내려온 장기렴의 거듭된 위협에도 단연코 해산을 거부했다. 해산령을 참다운 왕의 명령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마침내 5월 25일, 호좌의진은 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고, 결연히 맞서 싸워 몇 차례나 물리쳤으나 비바람이 부는 악천후 속에 경험 부족으로 남산 전투에서 패하여 제천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열렬한 척사론자로서 의진을 이끌면서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安承禹)와 그의 종사 홍사구(洪思九)가 의를 부르짖다 죽음을 당하였다.

제천 지역을 잃은 유인석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여러 고을을 전전하다 마침내 서행(西行) 길에 올랐다. 서북 지역에서 재기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이후 수많은 전투를 거치는 가운데 앞장섰던 서상렬도 전사했다. 결국 호좌의진은 서북 지역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고, 파저강(波瀦江)[혼강(渾江)] 언덕에서 의진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인석은 해외에서 새로운 항일 근거지 건설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에 들어와 의병 봉기를 측면 지원하였다.

[을미 의병의 정신을 이은 을사 의병의 활약상]

1896년(고종 33)의 아관파천 이후 여러 이권이 열강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한국에서의 간섭을 본격화했으며,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정서를 통해 이권을 확대하고 고문 정치를 제도화했다. 나아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저항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천 지역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는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척사적 성격을 가진 향약이 실시되어 매국 단체인 일진회에 맞서고 있었다. 향약을 주도하는 이들이 의병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대처는 대단히 직접적이어서, 도둑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포수대까지 갖춘 향약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권 침탈에 분개한 원용팔이 주천에서 먼저 봉기했다. 을미 의병 당시 호좌의진의 맹장이었던 그가 봉기하자 옛 동지들이 속속 합류했다. 그리하여 원주에 주둔하던 진위대 병력까지 합류했으나, 내응하기로 했던 진위대장 김귀현이 배반하면서 원용팔은 체포되고 말았고, 어렵게 모였던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원용팔이 체포되자 역시 을미 의병 당시 맹장으로 활동했던 정운경이 단양에서 봉기했다. 정운경은 수백 명의 포군을 모으고 기세를 올렸으나 그 역시 별다른 성과 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원용팔은 “죽어서라도 벼락귀신이 되어 왜놈을 치는 사람이 있으면 돕겠다.”라고 맹세하고 옥사했고, 정운경은 외딴 섬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원용팔정운경의 봉기는 구체적 성과는 적었으나 을미 의병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동지들은 유중교가 강학하던 옛 터전 곁에 자양영당(紫陽影堂)을 세워 춘추대의를 세우려는 그들의 신념을 다지고자 했다. 을미 의병 이래 의병장의 이름으로 공포된 격문과 주고받은 의리의 문자는 끊임없이 베껴져서 읽혀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모두 새로운 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재건된 호좌의진과 정미 의병의 활약상]

국권 침탈이 극을 이룬 것은 1907년 여름에 있었던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었다. 이토[伊藤] 통감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박했고, 국권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인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해산을 거부하는 저항도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그런 분위기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던 해산 군인들의 저항은 전통적인 의병론자들이 신식 무기를 얻는 기회가 되었다. 많은 의병론자들이 민긍호(閔肯鎬)를 중심으로 하여 해산 군인들이 봉기한 원주를 향해 달려갔고, 무기를 얻어 봉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천에서 진압하러 달려온 일본군과 천남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천남 전투에서 승리한 여러 의진은 연대를 통해 항일전을 수행했다. 그 가운데 호좌의진의 맹장으로 활동했던 이강년이 호좌의진을 재건하였다. 본래 문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의 새로운 투쟁의 고향은 제천이었다.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이강년은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도, 경기도 일대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며 활발하게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게릴라전의 전투 양상은 일정한 지역을 장악하고 시위하던 을미 의병의 성격과는 크게 달랐는데, 이는 일본의 정규군과 맞서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여러 의진들은 연대하여 혹은 합치고 혹은 각자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07년 말이 다가오면서 의병 항쟁은 위기에 직면했다. 탄환이 부족해지기 시작한데다 일본군의 압박이 날로 거세졌다. 이강년은 12월에 있었던 단양 복상골 전투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북상의 길을 선택했다. 당면한 과제는 무사히 겨울을 나는 것이었다.

이때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인영(李麟榮)으로부터 서울 진공 작전에 관한 제안이 도착했다. 이강년은 전투 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경기도 가평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렸다. 결과적으로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제에게는 이강년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협이었기에, 휴식을 통해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결국 이강년의 호좌의진 역시 화악산의 엄청난 추위와 싸우면서 겨울을 무사히 넘겼다.

1908년 봄이 되자 이강년은 다시 일본군과 부딪치기 시작했다. 일부 동지들은 만주로 넘어가 투쟁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이강년은 동지들이 외롭게 투쟁하는 근거지로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경상북도 북부 지역인 서벽과 재산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병력은 줄어들고 일본군의 탄압은 거세졌다.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기회를 맞으려던 이강년은 1908년 6윌 청풍 금수산에서 일본군 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이강년의 뒤를 이어 김상태(金相台)·김상한(金商漢)·이명상(李明相)·원건상(元建常) 등 여러 동지들이 잔여 병력을 이끌고 산발적으로 항전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까지 투쟁이 이어졌으나 기세를 떨치지는 못하였다. 김상태가 1911년에 체포된 것은 호좌의진의 종말을 알리는 슬픈 소식이었다.

[제천 지역 의병 운동의 역사적 의미]

제천 지역에서는 개항기 내내 끊임없이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을미의병 당시 호좌의진이 떨쳤던 용감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흔히 3관찰 6군수를 베었다고 하는 타협 없는 과감한 투쟁 노선과 의롭지 못한 것에 대항했던 단호함은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호좌의진은 화서학파가 내세우는 정통성을 통해 계승되고 인적인 충원이 이뤄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정미 의병기에 이르면 의병 활동의 주도권이 평민층으로 넘어갔으나, 제천 지역 의병 활동은 유인석이강년으로 이어지는 지도층의 선이 비교적 강고했다. 물론 평민적 지향을 가진 군소 의진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일본군에게 그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또는 농민들의 지원을 용이하게 얻기 위해 호좌의진과 관련을 맺고 그 연관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항기 제천 지역 의병 활동을 ‘호좌의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한편, 호좌의진을 이끌었던 유인석의 경우에서 보듯이 나라 밖에 저항의 기지를 건설하는 노선으로 이어지는 것도 뜻 깊은데,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운동의 기지를 세우는 노선의 시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나라 밖으로 망명하여 뜻을 이루고자 했던 유인석은 국내의 동지들보다 더 넓은 시야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만들면서 의병을 통한 국권 회복의 날을 고대했다. 그 자신이 직업 망명객들을 모으고, 의리를 약속하고, 십삼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의 직에 추대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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