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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78
한자 李麟榮
영어음역 Yi Inyeong
이칭/별칭 공진(共振),중남(重南),이준영(李竣榮)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9년 6월 7일연표보기
출생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출생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내룡리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제천 전투에 참가한 관동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진(共振), 호는 중남(重南). 일명 이준영(李竣榮)

[활동 사항]

이인영(李麟榮)[1867~1909]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내룡리 출신이다. 1895년(고종 32) 말 단발령이 발표된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원주에서 봉기하여 주로 여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과 힘을 합쳐 일본군이 주둔하던 가흥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여하였고, 관군으로부터 제천을 지키려는 호좌의진의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청나라 병정을 끌어들여 의병의 기세를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을미의병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의병 활동 과정에 관청의 공금을 끌어다 썼다는 이유로 토지를 몰수당하고, 문경과 제천의 덕산 등지에 은거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으로 다시 봉기하였다. 이은찬(李殷瓚)·이구채(李求采) 등이 모은 500명이 넘는 해산 군인 등을 토대로 ‘관동창의대장’이 된 것이다[9월 2일]. 이후 이인영 의진은 흔히 ‘관동의진’, 또는 ‘원주의병’이라 일컬어졌다. 당시 이인영은 명망 있는 유생 출신이면서도 해산 군인을 다수 포함하는 의병을 이끌어 척사 의병과 해산 군인 의병의 중간적인 형태의 의병 부대를 이끌었고, 고종에게서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이인영은 밀지의 권위를 내세워 여러 의진의 연대를 추진하였다. 문경에서 단양·영춘 등지로 북상하면서 호좌의진, 김현규의 여주의진, 민긍호 부대 등과 직·간접적으로 제휴하였고, 10월 중순에는 지평의 삼산리[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10여 개 의진이 이끄는 수천 명의 병력을 모았다.

이인영은 지평의 삼산리에서 8도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 및 각국의 영사관에 격문을 보냈다. 특히 여러 공사관에 보낸 통문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어긴 일을 비판하고, 의병을 전쟁 단체로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뿐 아니라 국외의 교포들에게도 격문을 보내어 국제 여론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행동은 서구인들이 한국인들의 의병 항쟁을 ‘자유 전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약 2개월 동안의 삼산 주둔 기간에 이인영의 관동의진은 민긍호 부대와 연대하면서 여러 중소 규모의 의병 부대를 관동의진 휘하에 편제시켰다. 대표적인 휘하의 의병장으로는 방인관(方仁寬)·정봉준(鄭鳳俊)·김병화·권중희·이구채·이은찬·김현복 등이 있다. 그중에는 상인이나 금광 노동자 같은 하층민도 있었다. 따라서 이인영의 관동의진은 사족(士族)이 지도층을 독식하다시피 한 을미 의병기의 여러 의진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인영은 관료 출신으로서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허위(許蔿) 의진과도 공조하였다.

1907년(순종 1)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이인영의 관동의진은 서울 진공 작전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걸쳐 치러진 대규모 삼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였기 때문이다. 이인영의 관동의진은 북상하여 양주로 이동하면서 전국의 의진을 서울 진공에 결집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2월에는 당시에 활동하던 8도의 주요 의병장이 모두 참여하였다는 ‘십삼도창의진(十三道倡義陣)’을 건설하였는데, 실상은 이인영이 이끌던 관동의진에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허위의 의병 부대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인영이 주도한 서울 진공 작전은 한때 도성을 지키는 일본군을 긴장시켰으나, 동대문 밖까지 진출한 선발대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물러섰고, 이인영이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지휘부에서 물러서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은거하였다가,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현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으로 옮겼는데,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그해 가을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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