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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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萬源 |
영어음역 | Yi Manwon |
이칭/별칭 | 해수(海水),산재(汕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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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월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강년 의진 도총독장 |
[정의]
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해수(海水), 호는 산재(汕齋). 아버지는 이부의(李孚儀)이다.
[활동 사항]
이만원(李萬源)[1867~1943]은 박세화(朴世和)에게 배웠는데, 국운이 기울자 월악산에 들어가 병서를 읽으며 의병 봉기의 뜻을 품었다. 단발령 이후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을 때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종군하였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 전개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을 좇아 독전장(督戰將)으로서 갈평·연풍 지구 전투 등 소백산 자락에서 벌어진 수많은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다. 특히 의진이 탄환 부족에 시달리자 봉기 초기에 원주에서 얻어 원주 배향산에 숨겨 둔 탄환을 두 차례에 걸쳐 운반하여 의병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공로로 도총독장(都總督將)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도 권용일(權用佾)·백남규(白南奎) 등과 힘을 모아 항일 의병전을 계속하였다.
1909년(순종 3) 1월 잠시 부모를 만나러 귀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곤궁한 만년을 보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산재집(汕齋集)』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유격전을 하는 의병의 모습을 묘사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