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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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泳八 |
영어음역 | Min Yeongpa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민영팔(閔泳八)[1870~?]은 단양 현곡리에서 살았으며, 을미의병 당시 의병을 일으켜 제천·청풍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적과 싸우다가 1896년(고종 33) 11월 홍주에서 잡혀 진도로 유배되었다. 1907년(순종 1)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였고, 정미 의병 때 단양에서 이명상(李明相)과 함께 포군을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명상·이강년(李康秊)의 사후까지 계속 명봉사 등지를 근거지로 투쟁하였다.
스스로를 호좌장의중군이라 칭한 점으로 보아, 이강년이 재건하고 김상태(金尙台)가 뒤를 이은 호좌의진의 지휘 계통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순종 3) 5월 일제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민영팔의 부대는 예천 명봉산에 있는 명봉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수하는 240명 정도이었다. 그리고 군수품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지만 준비가 끝나는 대로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일본인과 친일분자를 처단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민가에서 묵지 않고 산속에서 노숙하면서 자취하는 전형적인 게릴라 부대로 활동하였다.
민영팔은 주로 경찰서나 순사 주재소 및 헌병 분견소에서 떨어진 청풍·단양 등지의 산간 마을의 이장들 앞으로 물자 징발을 미리 예고한 뒤 순회하면서 물자를 거두어들였는데, 대판·용하소·억수동·곡현·성암·성내·적곡, 그리고 경상북도의 적성·산달리 마을 등을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