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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043
한자 住生活
영어의미역 Housing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집필자 김승대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의 주택과 주거지에서의 삶.

[개설]

김제 지역에는 손효성 가옥, 김제 신풍동 일본식 가옥, 오영순 가옥, 최희성 가옥, 함태영 가옥, 황병주 가옥 등의 전통 가옥과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는 전통 가옥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의 가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후장마을 가옥의 평면 구성과 규모 등을 보면 김제 지역의 가장 전형적이라고 생각되는 서민 가옥·중류 가옥·상류 가옥 등 3계층의 특성을, 전라북도의 다른 지역의 가옥과 비교하면 후장마을 가옥의 성격을 잘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상류 가옥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에 중점을 두면 이 지방 상류 가옥의 생활 풍습이 어떠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제 지역은 넓은 호남평야 지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후장마을 가옥의 성격을 호남평야 지대 가옥의 성격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김제시 장화동은 김제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4㎞ 떨어진 김제와 부안을 이어주는 국도 29호선 가까이에 위치하며, 이른바 김제평야를 눈앞에 둔 전형적인 농촌으로 동래정씨 집성촌이다. 현재 동래정씨 입향조의 16~17대 후손들이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입향조 이래의 선조의 묘지와 재실, 2기의 적선비, 2동의 정문 및 모정이 있다. 이들 동래정씨의 주거지를 서민 가옥·중류 가옥·상류 가옥 등으로 구분하여 알아보자.

[동래정씨 주거지]

1. 서민 가옥

서민 가옥은 뒷면과 우측이 두께 40㎝의 흙벽으로 된 담집이다. 전면에만 기둥을 세웠으며, 앞쪽에는 높이 50㎝의 흙 축대를 쌓고 집을 지었다. 지붕은 초가이며 평면은 기역자형으로 구성된 고패집이다.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고 양쪽에 큰방과 아랫방을 배치하였다. 윗방 위에 광방을 둔 공간 구성을 보면 정읍 등지의 서민 가옥과 상통한다. 광방은 중류 가옥이나 상류 가옥의 도장과 같은 기능을 지닌 공간으로 이곳에는 곡식이나 조미료 등이 담긴 독, 항아리 그리고 잡다한 세간들을 넣어 둔다. 큰방에는 부엌 쪽에 벽장이 설치되어 있다. 큰방에서는 주인 정씨 내외가, 윗방에서는 그의 아들 내외가 기거하며 아랫방은 손자가 사용하였다.

광방은 윗방 앞에 흙벽을 치고 이 부분의 처마를 슬레이트로 이어내고 이곳에 항아리 등을 두게 되었으며, 한편 외양간이던 아랫방 전면을 헛간으로 개조하였다. 부엌의 면적이 비교적 넓은 것은 땔나무 등을 두는 외에 이곳을 주부의 작업장으로 이용하기 위한 때문이다. 좌측에는 붙박이 찬장이 있다.

큰방과 윗방에는 편천정을 베풀었으나 광방과 아랫방에는 천정 시설이 없다. 따라서 아랫방의 경우, 중앙부[높이 210㎝]와 벽측[높이 173㎝]에서의 방의 높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이 방 출입문 앞에는 평상을 놓아 마루를 대신하였다. 큰방 전면의 마루도 넓은 평상처럼 짜서 부착시켜 사용하였다. 방과 마루 사이에는 출입문인 띠살문 외에 대쪽으로 살을 얽어 만든 되창을 달아 채광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방 뒤쪽의 문들도 모두 대쪽을 문창 형식으로 짠 것인데, 가옥 후면에는 원래 문이 없었고 작은 창만 있었다. 부엌 후면의 널문도 근래에 달은 것으로, 본래는 거적문이 있었다. 장독대도 현재 꽃밭자리에 있던 것을 위와 같이 집을 일부 개조할 때 옮겨 놓았다. 담집은 원래 기둥이 없이 흙벽만을 쌓아 짓는 것이 보통이나 다소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 집처럼 앞쪽에 기둥을 세우기도 한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은 안화장실과 바깥 화장실을 각기 두어 남녀별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상류 가옥에서는 화장실을 내외별로 따로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호남 지방의 경우에는 중류 가옥에 화장실이 하나뿐인 것이 보통이므로 그만큼 예외적이라 하겠다. 이 집은 정씨의 조부가 지은 것이라 하니 적어도 100여 년이 넘은 것을 알 수 있다. 서민 가옥이라고는 하여도 평면 형식이나 살림살이의 내용이 다른 중류 가옥에 견줄만하다. 김제시 장화동이 평야지대인 만큼 경제적인 여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2. 중류 가옥

중류 가옥은 네 귀가 반듯한 장방형의 너른 대지 위에 세워진 정면 6칸, 측면 한 칸 반의 초가이다. 우측과 전면에는 시멘트담을 그리고 좌측으로는 흙담을 둘렀으며, 후면에는 역시 흙담을 가운데 두고 이웃집과의 경계를 삼았다. 몸체의 앞뒤로는 퇴마를 놓고 방과 방 사이에는 대청을 두었다. 대청이라고는 하여도 일반 가옥의 대청처럼 전 가족의 거실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서가 아니라 다만 수장 공간으로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대청 후면의 널문은 거의 언제나 폐문의 상태에 있으며, 앞쪽의 문도 개방되는 일이 드물다. 이 대청은 결국 서민 가옥의 광방이나 상류 가옥의 도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집에서는 대청을 더욱 쓸모 있게 하려고 큰방의 일부를 줄이고 그만큼 대청을 넓혔다.

이러한 형태와 기능을 지닌 대청은 전라남도와 영남 지방에서도 더러 볼 수 있으므로 이 지방의 독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큰방과 마루 사이에는 출입문인 외짝 띠살문 외에 서민 가옥에서처럼 되창을 달았다. 그리고 건넌방 마루는 누마루로 하여 아래에 부뚜막을 설치하였다.

부엌은 비교적 너른 편이다. 중앙부에는 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위와 아래 2단으로 하여 하부는 부뚜막 쪽을 개방하여 땔나무 등을 넣도록 하고 상부는 반대쪽에 문을 달고 이곳을 찬장으로 이용한다. 문이 반대편에 있어 그 사용이 다소 불편할 것이나 먼지나 연기 등을 막기 위해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이 작은 공간은 너른 부엌에 변화를 주는 동시에 실용성도 있어 매우 독특하다. 한편 큰방 쪽을 제외한 부엌 3면의 상인방과 중인방 사이에는 살창을 두어 채광 및 배연의 보조적인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닭장은 매우 특징적이다. 네 개의 기둥을 의지하여 널판 쪽을 대어 벽을 삼았으며, 이 위에 짚으로 이엉처럼 엮어서 지붕을 얹어 작은 규모의 집을 연상시킨다.

대문 우측에는 화장실을 겸한 잿간이 있었던 것을 블록으로 창고를 짓고 화장실을 별도로 세웠다. 너른 대지에 건물은 일자형 몸체와 창고, 헛간, 화장실뿐이어서 매우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외양간이나 잿간 등이 없는 것은 주인 정씨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이다. 거주자는 주인 정씨 내외뿐이며, 이들은 큰방에서 기거한다.

3. 상류 가옥

상류 가옥은 1859년에 지었으며, 건축자의 2세손이 구례군수를 지내어 김제 인근에서는 장화정구례(長華鄭求禮) 집으로 불렸다. 부정형의 대지 우측에는 남새밭을 일구었으며, 바깥 담 쪽으로는 대숲을 가꾸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탱자 울타리를 쳐서 공간을 구획한 것은 이쪽에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 사랑채 사이에도 담을 쳐서 안채와 사랑채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각 채의 규모, 평면 구성, 배치 등은 전라북도 지방 상류 가옥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건축 80여 년 만에 주인이 바뀌는 비운을 만났던 이 집은 건물 자체에도 많은 수난이 있었다. 현재 건립 당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고방채 한 동 뿐이며 안채, 안 사랑채, 안 행랑채, 사당채 등은 3~5년 전에 철거되었다. 현재는 근년에 신축된 안채 외에 변개된 사랑채와 행랑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건립 당시 이 집의 건물은 모두 초가였으며 사당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노인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가(私家)에 두리기둥의 사용을 금지한 국가의 규제를 그 원인으로 든다. 따라서 집을 지을 때 사랑채에 두리기둥을 세우는 대신 지붕에는 개와를 얹지 않는다는 조건을 건축자가 내세웠다는 것이다. 둘째, 집을 지은 세연의 몽조가 돼지 터였으므로 집이 돼지우리 같아야 한다고 믿어 초가로 하였다는 풍수적인 설명이 그것이다.

이 집에는 이 외에도 풍수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월촌면[현 교동월촌동]의 지형이 야자(也字)형인데 이 집터가 그 중심부에 해당한다고 믿었고, 화기를 꺾는다고 사랑 마당에 못과 우물을 팠다. 그리고 안 행랑채를 건축한 것도, 불과 건축 5~6년 뒤에 철거한 것도 모두 풍수가의 권유에 따랐던 점 등이 그것이다. 풍수설 때문에 큰집의 지붕을 초가로 한 예는 고창군 흥덕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가옥의 규모나 사용된 목재로 보아서 다른 상류 가옥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건물이다. 그런데 집을 지은 이는 뒷산이 배의 형국이어서 배에 짐을 많이 실으면 뒤집힐 염려가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결국 초가로 하였다는 것이다.

집이나 집터에 대한 풍수설을 믿는 정도는 영남보다 호남 지방이 더욱 깊은데, 이와 같은 현상은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두리기둥을 사가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국초부터 중요 유훈의 하나인 조상 숭배 사상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개인의 사당에 단청을 올리는 것은 허용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중기 이후에는 건축물에 대한 금제도 사실상 해이해져 이 집보다 앞서 세워진 가옥 중에도 두리기둥을 세운 예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를 일삼는 관헌, 빈발하는 민란, 화적떼 등의 눈을 가리려는 의도도 많이 작용하여 결국 가옥의 모든 지붕을 짚으로 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안채

본래의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한 칸 반의 건물로 3칸의 부엌과 각각 한 칸 반의 큰방과 대청 그리고 한 칸의 건넌방이 배치되고 부엌을 제외한 전면에는 반 칸 너비의 툇마루를 놓았다. 이 안채는 철거되고 같은 자리에 7칸 건물을 세웠다. 바뀐 사항을 보면 건넌방이 앞마루까지 나왔고 대청을 없애는 대신 같은 넓이의 방을 놓았다. 한편 큰방 뒤에 골방을 두었으며, 부엌의 넓이를 줄이는 대신 지하실·목욕탕·가정부방 등을 새로 두었다. 이 채의 좌측 전면에는 쌀뒤주가 있었다. 이것도 초가였던 것을 양기와지붕으로 바꾸고 우측 전면으로 옮겨 놓았다. 서민 가옥의 나락뒤주는 이의 대용품인 것이다.

2) 고방채

고방채는 원래 정면 5칸, 측면 2칸의 집이었으나 근래에 외양간을 이어 달았다. 마룻대는 중앙에 세운 2개의 고주가 직접 받으며, 이 고주를 의지하여 보를 좌우로 건너질렀다. 널문이 달린 벽을 제외한 전면 벽의 중인방과 상인방 사이에는 대쪽을 촘촘히 세워 벽 처리를 하였고, 안쪽에는 굵고 둥근 나무를 듬성듬성 박아서 이를 보강하였다. 이것은 통풍을 돕기 위한 것으로 매우 특이한 구조이다.

3) 안 사랑채

정면 6칸, 측면 한 칸의 건물로 안대문 외에 사랑에서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과 2칸의 행랑방·고방·안화장실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채는 철거되었다.

4) 안 행랑채

정면 6칸, 측면 한 칸의 건물로 방 3칸, 부엌 한 칸, 고방 2칸이 있었다. 이 채는 안채의 우측이 허술하다고 하여 1915년경에 세웠으나 수구막이에 건물을 지으면 해롭다는 풍수의 말을 좇아 건립 5~6년 뒤에 다시 철거하였다. 현재 이 채의 북쪽에는 3칸 크기의 태지막을 세웠다.

5) 사당채

안채는 단칸 건물로 초가였으며, 근년에 철거되었다.

6) 사랑채

초가였던 이 건물은 지붕이 양기와로 개조되었다.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의 건물로 앞뒤에 퇴를 두르고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규모는 목재건축 수법이나 격식이 상류 가옥 사랑채에 걸맞게 되어 있다. 사랑큰방과 동자방 마루 앞에는 난간으로 치장하였으며, 마당에는 화원을 꾸미고 연당과 우물을 파 놓았다.

사랑방과 동자방의 대청 쪽의 네 짝 들문 상하에 세살 띠를 둘렀으나 중앙부에는 아자(亞字)살을 베풀어서 한결 밝은 느낌을 준다. 자칫하면 어둡고 칙칙하기 마련인 대청의 분위기가 이로써 밝게 바뀌었다. 그리고 방들의 모든 미닫이에도 역시 아자살을 먹여 놓았다. 사랑방 앞쪽 문턱의 높이는 60㎝로 매우 높다. 불의의 침입자가 대문 쪽에서 쏘는 화살을 엎드려 피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다.

사랑방 천정과 지붕 사이에는 다락을 꾸미었다. 이 다락은 골방천정의 마루청을 들고 드나들게 되어 있어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입구를 찾기 어렵다. 서쪽의 사랑 큰방에는 노인이, 그리고 동자방에는 젊은 주인이 기거하였다. 좌측의 외양간은 근래에 달아낸 것이다. 상류 가옥에서는 가축을 키우지 않으며, 더구나 사랑채에 외양간을 이어 세우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시대의 변천과 함께 사랑채의 기능이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7) 행랑채 및 기타

행랑채는 5칸 건물로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말간방[마구]과 공부방이, 우측으로 행랑방과 바깥 화장실이 있었다. 현재 행랑방과 화장실은 고방이 되고, 말간방과 공부방은 헛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붕에는 3칸의 초가를 세워 잿간, 오줌간, 바깥 화장실을 두었다.

이 집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임종만은 안채의 큰방에서 맞이하였으며, 며느리에게 살림을 넘겨주는 경우에도 방은 교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년의 부부는 큰방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장독대에는 집지킴인 철륭단지가 있으며 부뚜막에도 조왕단지를 두었다. 큰방에는 성주를 모시고 정월과 추석의 양 명절과 아들의 생일에는 상을 차리고 수명복락을 빌었다. 성주상에는 술과 국은 올리지 않는다. 이러한 가정신앙의 대상물들은 그 종류와 성격에 있어 부안 지방과 상통하는 점들이다.

[장화동 가옥의 특징]

김제시 장화동의 가옥을 통한 김제 지역의 가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마루에 관한 것이다. 서민 가옥에는 원래 마루가 없었으며, 뒤에 평상처럼 널판으로 짜서 부착시키거나 또는 평상으로 대신하고 있다. 중류 가옥에서는 대청을 도장처럼 사용하여 대청 본래의 기능이 둔화되어 있으며, 상류 가옥에서도 안채를 신축할 때 본래의 대청을 없애고 방을 두었다. 마루 기능에 대한 약화는 이 지역뿐만 아니라 서해의 어청도나 대륙의 정읍·익산 등지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적어도 전라북도의 서부 지역에서는 마루의 발달이 매우 늦었으며, 발생의 면에서 볼 때에도 거의 무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라북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면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패집은 김제시 장화동에 3동이 있다. 고패집은 김제 지역의 일반적인 가옥 형식이 아니며, 전라북도 지방을 통틀어 보더라도 매우 특이한 존재라고 하겠다. 나락뒤주는 규모가 매우 크며, 나락만을 갈무리하기 위해 그만한 규모의 것을 따로 세우는 예는 매우 드물다. 보통은 추수 때 안마당에 짚방석을 둥글게 두르고 주저리를 씌워 여기에 나락을 담아 두고 사용하며, 대개 봄철이 되면 자연히 철거되는 것이다.

큰방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살림을 넘겨는 주어도 방을 바꾸지는 않는 생활 풍습은 전라북도의 다른 지역과 상통한다. 그러나 노년의 부부가 큰방에서 함께 기거하는 점은 김제 지역만의 특징이라 하겠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랑방의 노인은 임종 때에라야 큰방으로 옮겨지는 것이 보통이다. 가령 현재 노부부가 방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김제나 정읍의 생활 풍습에도 차이가 있고, 더구나 영남 지방에 비하면 크게 차이가 난다.

정읍에서는 안노인은 큰방에서, 바깥노인은 안채의 건넌방에서 기거하여 사랑채의 기능이 약화 내지는 정지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북도 지방에 있어서는 안노인은 안채에, 바깥노인은 사랑채에 각기 기거하여 사랑채의 기능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남녀유별의 유훈을 생활해 가는 점에 있어서도 호남과 영남 두 지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둘째, 비료사(肥料舍)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김제 지방에서 가장 많은 보통 구조는 종횡이 다같이 182㎝ 내지 273㎝이며, 높이 182~212㎝인 소규모인 집을 지어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돌흙 혹은 흙만으로 천정까지 쌓은 후 짚으로 지붕을 덮는다. 비료사의 출입구는 개방하는 것을 상례로 하나 짚자리 같은 것을 기둥거리로 해 놓은 데도 있다.

비료사의 내부는 출입구의 좌측 또는 우측에 2개의 디딤돌을 놓아 두고, 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물을 배설한 후 편평한 목제봉으로 디딤돌 앞에 있는 재를 조금 오물 위에 덮고 뒤로 던져 모아서 점차 퇴적한다. 그리고 사내의 빈 곳에는 등겨 혹은 쓰레기를 퇴적하여 퇴비 형상을 만든다. 또 드물기는 하나 디딤돌 쪽에 15~18㎝의 길이로 절단한 짚을 싸두어 오줌이 지중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이는 오줌을 받는 유지가 없는 까닭이라고 하겠다.

간혹 다른 것도 있으나 대개는 조작으로 주가의 부근에 나뭇가지, 수숫대짚, 송엽 등으로 작은 움막을 만들어 지붕은 두지 않은 채 지면을 탄 그대로 디딤돌을 두거나 또는 길가에 오물을 배설하여 버림도 적지 않았다. 이런 경우 신선할 때는 개·돼지 등에 먹이기도 하지만 날이 갈수록 우설로 말미암아 부근의 불결함은 물론 심히 비경제적이었다. 대개는 조작으로서 주위의 벽과 지붕 사이에 61~91㎝의 공간 둠을 보통으로 한다.

어느 지역에서는 택지의 일우에 유통 또는 항아리를 묻어 놓고 그 위에 밟을 나무를 걸쳐 놓거나 혹은 밟을 나무를 걸치지 않고 유지의 곁에 있는 디딤돌에 의지하여 배설하기도 한다. 또는 디딤돌에 쭈그리고 앉아서 배설하면 대변은 바로 유지로 떨어지고 소변은 디딤돌 사이의 경사를 따라 유지로 유입한다.

그래서 비료사는 세로 모로 다 같이 182㎝ 정도로 하며, 유통의 주위에 통나무 기둥을 세워 출입구를 제외한 세 방향은 짚자리 등으로 가린다. 그러나 갈대의 생산이 많은 지방에서는 이를 엮어서 가리고, 그 외는 토벽으로 가리기도 한다. 지붕은 두지 않는 것이 많다. 주가의 처마 밑에 작은 항아리 혹은 통을 묻고 그 위에 앉아서 하거나 또는 그 곁에서 배설하여 저장하는 것도 적지 않다. 그래서 유지의 주의는 거개 짚 풀을 가지며, 덮개는 하거나 이를 하지 않는 곳도 있다.

또한 주택의 처마 끝부터 내려 가린 후 그 밑에 지름 91~121㎝ 되는 유통을 묻고 밟는 막대기를 걸치며, 그 주위는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토석으로 벽을 쌓은 곳도 많다. 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이웃집의 화장실이나 부근의 전야에 배설하는 곳도 적지 않다. 이런 구조는 크거나 작거나, 정밀하거나 거칠거나 등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사당]

마을 중앙의 낮은 언덕 위에는 둘레 6m나 되는 느티나무와 함께 한 채의 사당이 있다. 이것은 입향조의 7대에서 갈려진 지손들이 세운 것으로 현재 9호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430 × 310㎝ 정도의 크기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1670년(현종 11)에 건립된 것으로 매우 오래된 건물이다.

사당은 집안에 두며, 담을 따로 두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곳은 파종손의 집 밖에 담도 없이 세워져 있으며, 더구나 지붕을 짚으로 덮었다. 위패도 현재는 3위만 봉안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당에 대한 이와 같은 소극적인 관심은 호남 지방의 공통적인 경향이며, 이것은 영남 지방과는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의 개개인이 지닌 조상 숭배의 관념은 이렇듯 매우 엷어져 가고 있으나 동족이나 문중의 차원에 이르면 동족 조직의 기능이 아직도 활발하며 영향력도 강하다. 후장마을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이 있으며 제답이 15,111㎡, 밭이 3정보, 산이 13정보가 있다. 그리고 상류 가옥을 팔려고 내놓았을 때 타 성씨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문중 모두가 힘을 합쳐서 동일 성씨가 이 집을 매입하도록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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