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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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在好 |
영어공식명칭 | Kwon Jaeho |
이칭/별칭 | 권호(權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나은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5월 21일 - 권재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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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권재호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6월 1일 - 권재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48년 9월 27일 - 권재호 대통령령 제8호 복권령으로 복권 |
추모 시기/일시 | 1996년 - 권재호 대통령 표창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권재호 3·13 만세운동 참여 |
출생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거주|이주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권재호(權在好)[1898~1945]는 1898년 5월 21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권성구(權性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밀양 출신의 윤세주(尹世胄)와 윤치형이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하여 경성에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들고 밀양으로 돌아와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권재호는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동참하였다.
권재호는 뜻을 같이 하는 밀양의 청년들과 3월 11일부터 3월 12일까지 정동찬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13일에 밀양 내일동 시장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권재호도 만세 운동에 찬동하면서 시위 의사를 밝히는 연명첩에 도장을 찍어 참여 의지를 드러냈다. 대형 깃발과 소형 태극기,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등사하는 등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권재호와 밀양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3월 13일 내일동 시장에서 3·13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청년의 지도자 역할을 한 김병환의 쌀가게 근처에서 밀양의 청년들이 모여 시위행진을 시작하여 시장, 보통학교를 거쳐 남문을 일주하였다. 군중들도 시위행진에 호응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당시 권재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시위대의 기세가 드높아지자 밀양 주재 헌병과 경찰로는 진압이 불가능하여 부산에서 일본 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었다. 체포된 권재호는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재호는 1945년 6월 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권재호는 1948년 9월 27일 대통령령 제8호 복권령(復權令)에 의하여 복권되었으며, 이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