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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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致衡 |
영어공식명칭 | Yoon Chihyung |
이칭/별칭 | 김시화(金時化),윤추암(尹推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정원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9월 10일 - 윤치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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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윤치형 일합사 조직하여 비밀 항일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윤치형 밀양 3·13 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윤치형 만주 길림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윤치형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결석공판으로 징역 1년 6개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 윤치형 의열단 결사대원으로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윤치형 폭탄 구입 및 국내 반입 등으로 일제에 검거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6월 - 윤치형 경성지방법에서 징역 5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3월 - 윤치형 밀양청년회 제13차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2월 - 윤치형 신간회 밀양지회 정식 창립식에서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 신간회 본부대회 출석대표로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2월 - 윤치형 신간회 정기대회 대표 위원으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4월 - 윤치형 신간회 밀양지회 제3기 집행위원으로 선출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11월 16일 - 윤치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윤치형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윤치형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부내면 노하리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
거주|이주지 | 길림 - 중국 지린성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정기대회 대표 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윤치형(尹致衡)[1893~1970]의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호는 유암(維岩, 維巖)이다. 이명으로 윤추암(尹推岩)이라 하였고,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김시화(金時化)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93년 9월 10일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활동 사항]
윤치형은 1913년 안곽(安郭)·이각(李覺)·황상규(黃尙奎) 등 20세 전후의 밀양 청년들과 함께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비밀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합사는 외견상 친목 단체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항일투쟁 단체였다. 핵심 인물은 윤치형을 비롯하여 황상규·김대지·구영필·안확·이각·명도석 등이었다. 일합사는 1916년 말 일제에 발각, 조직원들이 체포되어 조직이 해체되었다.
윤치형은 1919년 2월 윤세주와 함께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에 참석하였다. 3·1운동을 직접 체험하고 얻은 「독립선언서」를 밀양으로 가지고 내려와, 1919년 3월 13일 밀양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13 만세운동으로 8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하여 윤세주와 함께 만주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4일 일본 경찰은 윤치형과 윤세주를 체포하지 못하자 미결수로 송치하여,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의 결석공판에서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11월 10일 길림성에서 김원봉·윤세주·이종암 등이 일제의 중요기관 파괴와 일제 주요 인물·친일파 등의 처단을 목적으로 한 의열단을 조직하였는데, 윤치형은 여기에 참가하여 의열단 결사대원이 되었다. 1920년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의거에 참가한 윤치형은 폭탄 구입과 국내 반입 등에 종사하다가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폭발물취체벌칙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한 후 윤치형은 1927년 3월 21일 밀양청년회 제13차 정기총회에서 밀양폭탄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한 동지들인 황상규·윤세주·김병환 등과 함께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5월 3일에는 당시 밀양에서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던 군청 이전 반대 운동에도 앞장섰으며, 12월 11일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 의견을 모을 때에 사회를 맡았다. 12월 19일 정식 창립식에서는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2월 22일의 회의에서는 신간회 본부대회 출석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9년 2월에는 신간회 정기대회 대표 위원을, 5월 8일에는 경북 한재구재회 준비 위원을 맡았다. 9월 6일에는 신간회 경남도지회연합 발기준비 대표 위원회의 홍보 담당을 맡았다가 1930년 4월 1일 신간회 밀양지회 제3기 정기대회에서 김형달이 신임 집행위원장을 맡았을 때 집행위원으로 보좌하기도 하였다.
1934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윤치형은 1970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