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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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尙得 |
영어공식명칭 | Kim Sangdeuk |
이칭/별칭 | 김상덕(金相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나은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 김상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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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0년 - 김상득 밀양공립보통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11월 3일 - 김상득 김원봉과 함께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김상득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태 90대 언도 |
추모 시기/일시 | 1948년 9월 27일 - 김상득 대통령령 제8호 복권령으로 복권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김상득 대통령 표창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김상득 3.13 만세운동 참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9년 2월 15일 - 김상득 밀양초등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
출생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 462 |
활동지 | 밀양시 - 경상남도 밀양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상득(金尙得)[1901~?]은 1901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 462]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밀양 출신인 윤세주과 윤치형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19년 3월 11일~12일 이틀 동안 계획된 만세 운동은 3월 13일 밀양면 내일동 시장을 중심으로 발생, 많은 군중들이 동참하였으며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김상득은 권재호에게 받은 「조선독립신문」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만세를 외치는 군중에게 배포하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만세 시위는 밀양 주재 헌병과 경찰로는 진압이 불가능하였다. 부산에서 일본 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고 나서야 만세 운동은 겨우 진압되었다.
김상득도 체포되어 밀양헌병분견소에 구류되었다. 김상득은 시위 당시 19세였다. 재판에 회부된 김상득은 만세 운동이 발생한 당일 시장에서 시위행진에 합류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진술하였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제7조 위반 혐의로 태 90대를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김상득은 1948년 9월 27일 대통령령 제8호 복권령에 의하여 복권되었다. 이후 정부는 김상득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2019년 2월 15일 김상득은 밀양초등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10년 김상득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1년 11월 3일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에 반발하여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렸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