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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337
한자 建築
영어의미역 Architectur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홍식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전통시대와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

[개설]

건축이란 집이나 성, 다리 따위의 구조물을 그 목적에 따라 설계하여 흙·나무·돌·벽돌·쇠 따위를 써서 세우거나 쌓아 만드는 일이다. 김제시의 건축 유구(遺構)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작문화(稻作文化)의 특징에 걸맞게 삼국시대 축조된 수리 시설부터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인 유적이 벽골제이다. 이후 금산사가 창건되면서 김제 지역 건축은 전라북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깊은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지금까지 여러 사료에 의하면 백제는 3세기 말 마한의 국읍(國邑)을 아우르고 노령산맥 이북까지 진출하였다가 4세기 후반 초 근초고왕 대에 노령 이남의 마한 잔존 세력을 항복시키고 현재의 전라남도 해안 지방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후 백제는 기후가 온화하고 넓은 평야지가 지배하에 들어오자 수전도작(水田稻作)을 장려하고 대역사(大役事)를 일으켜 관개 시설을 축조하며 경제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전라북도 지방의 황등제와 벽골제, 고부눌제 등 대규모 저수지를 설치한 것이 이 무렵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기(新羅紀)에 보면, 김제 벽골제는 330년, 곧 백제 제11대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제 벽골제의 길이는 문헌마다 달라서, 『삼국사기』에는 1,800보로 기록되어 있고,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7,196척(尺),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60,843척,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7,196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시대 김제 지역에 축조되었던 성지로는 김제 성산(金堤城山), 사창산성 터(社倉山城터), 만경읍성 터, 성덕산 토성(聖德山土城), 동지산리 토성(東之山里土城), 금구토성(金溝土城), 용호리 산성(龍湖里山城), 원평토성(院坪土城), 상두산성(象頭山城), 명금산성(鳴琴山城), 월성리 토성(月城里土城), 서암리 토성(西菴里土城)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김제 지역 건축에서 금산사의 창건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금산사는 신라시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이는 진표율사금산사를 신라 5교(五敎) 중의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으로 이룩해 놓았고, 미륵전 등 수많은 불전을 세웠던 승려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과 1884년(고종 21) 나기익(羅基翊)이 편찬한 『김제읍지(金堤邑誌)』 등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표율사가 활동하기 이전부터 금산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들어 있다. 1943년 김영수가 편찬한 『금산사지』에도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왕실의 자복사(資福寺)로 개대(開垈)되었다고 초창 연대를 밝히고 있다. 또 초창 당시의 사양(寺樣)은 소규모로 대가람의 면모를 형성하지 못했다가 762년(경덕왕 21)에 진표율사가 개창(開創)에 착수하여 766년(혜공왕 2)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진표율사 이전에 초창된 뒤 진표율사에 의해 그 면모가 일신되었고, 견훤의 후백제 왕실과 밀착되어 크게 번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금산사 입구의 일명 ‘견훤성문’이라 불리는 금산사 성지의 유구는 금산사 창건과 함께 중요한 건축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

936년(태조 19) 후백제를 멸망시킨 태조는 940년(태조 23) 전국을 주·부·군·현으로 나눈 뒤, 지방 행정은 대개 그 지방의 향호(鄕豪)가 자치적으로 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성종 때 주현관(州縣官)이 설치되었으며, 다시 주·부·군·현과 관(關)·역(驛)·강(江)·포(浦)로 이름을 고치고 국내를 10도로 나눈 뒤 12주에 절도사를 두었다. 이 중 김제 지역은 군옥(群沃) 지역과 함께 지금의 김제시 성덕면에 고지(古址)가 있는 윤주(閏州)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제, 금구, 만경에 현령 등이 설치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관청 건축물은 없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김제 지역은 김제군(金堤郡), 만경현(萬頃縣), 금구현(金溝縣) 등 1군 2현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김제군은 원래 백제의 벽골군(碧骨郡)이었으나 신라 때 오늘날의 이름으로 고쳐졌고, 고려 전기 전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1143년 현령을 두었다가 1403년 군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건축물로 김제내아(金堤內衙)김제동헌(金堤東軒)이 있으며, 김제향교(金堤鄕校)·용암서원(龍巖書院)·만경향교(萬頃鄕校)·금구향교(金溝鄕校)의 건축물 및 금산사 미륵전을 비롯한 여러 사찰 건축물이 남아 있다. 오영순 가옥(吳永順家屋) 등 민간 가옥도 전해지고 있다.

[근대]

김제 지역에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로서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일제강점기 신풍동 일본인 가옥과 손효성 가옥 등이다. 또 금산면에는 대한제국 때 세워진 금산교회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증산법종교 본부영대 및 삼청전이 있다. 백구면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구 백구금융조합이 있고, 백산면에는 일제강점기 백두산에서 목재를 가져와서 세웠다는 백산서원(白山書院)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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