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2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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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藝術 |
영어의미역 | Culture and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찬,정연규,강수찬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음악·미술·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창원 문화 예술의 변천]
1980년 창원이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창원 지역 예술은 100여 년 전 개항한 마산시와 동일 생활권에 놓여 있어 모두 마산 예술로 설명되었다. 또한 1974년부터 국책 사업으로 추진된 기계 공업 단지 건설이라는 대명제 앞에 공장 용지 조성, 공장 유치와 건설, 배후 도시 건설 등으로 주민을 이주시키고 마을을 공업 용지로 조성하면서 문화적 토대인 삶의 근거지가 일시에 사라지는 공백기를 맞았다.
이 공백기는 원주민보다 직장을 따라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공단으로 이주해 온 직장인과 가족들이 많아 어느 도시보다도 문화적 욕구가 강했으나 욕구 충족에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시로 승격한 창원시에서는 문화 불모지라는 오명을 벗고 문화 예술의 활성화와 창원 시민들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기 위해 문화 정책을 서두르게 되었고, 마침내 1987년 미술, 사진, 국악, 음악, 문학, 연극, 무용 협회가 결성되어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가 창립되었다. 더불어 전통 문화 계승과 발굴, 시대에 맞는 문화 시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창원 문화원까지 창립하게 되어 창원의 미래를 밝게 비춰줄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창원의 문화 축제]
오늘날 창원시의 대표적인 봄 축제로 자리 잡은 ‘고향의 봄 축제’가 1980년대 후반 기본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제1회 고향의 봄 축제는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 산하 각 단위 지부별로 개최되었는데, 사진 협회가 마련한 기록 사진 및 전국 사진 공모전과 창원 사진 서클 합동전을 비롯하여 미술 협회의 미술 대상전과 회원전·시민 학생 미술 실기 대회와 음악 협회가 준비한 가곡의 밤, 문인 협회의 경남 학생 주부 백일장, 국악 협회의 국악인 초청 공연과 기악 연주회·전국 남녀 시조 경창 대회, 무용 협회의 전국 무용 경연 대회, 연극 협회의 「철새들의 추억」 공연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창립 1주년을 맞이한 1988년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에서는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더욱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하였다. 향토 시화 합동전을 비롯하여 예술인 대회, 송년 예술제 및 ‘현대 미술의 과제’[정문현 경상 대학교 교수]·‘문학의 존재’[전문수 창원 대학교 교수]·‘지방 연극의 방향’[안평선 한국 연극 협회 이사] 등의 주제 강연과 전정자 교수의 성악 공연, 권순자의 가야금 독주 공연이 그것이다. 그밖에 사진 촬영 대회와 창원 미술 대상전, 미술 초대전, 백일장 입상작 문집 발간 등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지금의 창원 예술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렇듯 시민 정서 함양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펼쳤음에도 공단 지역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벗어나기에는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노사 간 대립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노사 간 이해의 풍토를 조성하여 산업 사회의 각종 갈등을 해소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지역 사회의 발전을 앞당기자는 목적으로 창원시 공단 문화 발전 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가 주관하는 공단 문화 축제가 열리기도 하였다.
창원 지역의 전통 예술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현재 민속 축제로 거듭난, 1673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신 황시헌 공을 추모하기 위해서 벌이는 문창제 놀이[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5호]와 1976년 잠정 중단되었다가 1997년부터 다시 재현되고 있는 창원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창원 남산 상봉제이다. 이외에도 창원시에서는 1920년대까지 소답동 일대에서 성행하다 맥이 끊긴 창원 오광대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창원의 문화 예술 단체 및 공연 기반 시설]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와 창원 문화원 외에 문화 예술과 관련한 단체와 시설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86년 창단된 창원 시립 무용단이다. 그 후 1989년에는 지금의 창원 시립 교향악단의 모태가 되는 창원 교향악단[지휘자 김도기]이 창단되었으며, 1987년 창원 예술 극단, 1989년 극단 미소[대표자 천영훈]가 창단되고, 1990년 『창원 문학』 1집이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 예술 단체들이 등장하였는데, 영남 전통 예술 진흥회, 대안 공간 마루, 가향 문학회, 시인 학교, 문학 아카데미,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진 동호회와 창원 시립 합창단, 창원 소년 소녀 합창단,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산하 창원 문화 예술 학교 등이 생겨났다.
그런데 지금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은 문화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창원시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갖추어진 전시장과 공연장이 없어 행사를 할 때마다 애를 먹었다. 당시 주로 사용했던 공간은 반공 회관 강당, 교원 단체 강당, 창원 대학 봉림동 소강당,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와 창원 문화원이 더부살이를 하던 창원 보건소, 창원 KBS홀, 창원 YMCA 앞 부족 소극장, 시청 강당, 창원 전문 대학 문성 체육관 등이었으며, 심지어는 민정 회관까지 사용하였다. 또한 여름철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지금의 주말 토요 야외 공연의 모태가 되는 용지 호수 수상 무대 행사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참가 예술인들마저 흥에 겨워 즐기는 무대였다.
1986년 창원 문화 예술 회관 당선작이 결정되고 근 10년 가까이 끌었던 문화 회관이 성산 아트홀이라는 명칭으로 완공되어 보다 격조 높은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성산 아트홀 야외 공연장에서는 2005년부터 매주 수요일에 수요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 주관으로 '수요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보통 야외 공연이 진행되기 적합한 계절인 5월~8월에 '수요일 밤 & 아름다운 공연'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며 현대 무용, 국악, 외국 민속춤판 등이 번갈아가며 공연된다.
또한 창원시는 시민들이 단순히 문화 예술을 바라보는 수용자의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창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각종 문화 예술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인 1문화 예술 교육 학습으로 생활 속에 문화 예술이 뿌리를 내리도록 하고자 하는 취지로 강좌를 열고 있는 평생 문화 학교가 그것이다.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에서 10년 이상 운영하고 있는 창원 문화 예술 학교와 창원 문화원이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 유산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창원 박물 대학 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찾아가는 예술 활동인 성산 미술대전과 아시아 미술제, 창원 전국 국악 대전, 주말 차 없는 거리, 용지 호수 음악 분수쇼, 토요 용지 야외 공연 및 각종 음악회와 연극 공연, 국악 공연, 사진 교실, 창원 예술제, 시 낭송회, 창원 단풍 거리 축제, 창원 페스티벌 등 예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문화 예술 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펼쳐지고 있다. 또한 '토요 야외 어울림 마당'이 매년 6월~8월 토요일에 용지 공원 야외 공연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 예술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창원 문화원과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 회원들이 상주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는데, 이제 곧 창원 문화원과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의 회관이 착공될 예정이다. 창원 문화원과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창원 지부는 동시대에 같은 목적으로 창립되어 창원 보건소 건물에 세 들어 살다가 그동안 따로 떨어져 활동을 하였으나 한 건물에서 만날 날이 멀지 않게 됐다.
[창원의 문화예술인]
창원 지역의 문화 예술인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근대 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아동 문학의 거목 동원 이원수와 근대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이다. 아동 문학가인 이원수는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에서 2세에서 12세까지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노래 「고향의 봄」을 썼다.
김종영은 1915년 6월 25일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의안로 44번길 33[소답동 131-14]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기호와 어머니 이정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종영은 어려서 선친 밑에서 한학과 서도를 익혔다. 1982년 68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교육자·조각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한 김종영은 20세기 한국 미술사에서 현대적이고 수준 높은 조각을 일구어 낸 대표적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의의와 평가]
외형적으로 보면 창원시의 예술은 전체적으로 중흥기를 맞은 것 같다. 하지만 문화 예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켜봐주는 사람과 더불어 예술을 창작하는 행위자일 것이다. 창원시에서 운영하는 시립 예술단도 작업을 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겠지만 오랫동안 이 지역을 가꾸고 키워 온 민간 예술인들의 환경은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이 지역을 잘 아는 지역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해야하는 과제와 운영의 어려움에 놓여 있는 지역 예술 단체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개발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안목이 요구된다.
[마산의 문화예술]
1899년 마산포 개항과 더불어 개화의 물결에 따라 신문물의 급속하게 유입됨에 따라 마산은 서서히 근대 문화의 태동이 시작되고 항만 물류가 증가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면서 경상남도의 중심적인 도시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마산항은 여전히 어항의 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1980년대 말까지 어물의 집산지로 왕성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 속에서 마산의 문화는 전통 문화와 신문화가 혼재하면서 발전하게 되었고 해방과 함께 신문화를 습득한 출향 문화 예술인들의 귀국과 6·25 이후에 피난 온 유명한 문화 예술의 선각자들이 함께 활동하면서 1945년~1950년대 말까지 15년간 마산의 문화 예술은 꽃을 활짝 피우게 되고 ‘예향’이란 명성을 갖게 된다.
[마산 문화 예술의 변천]
신라 거유 최치원이 월영대를 짓고 문향의 기운을 지핀 후 마산은 고려 시대 조창이 설치된 후 조운이 발달하게 되고 전통의 어항으로서 어민들의 삶속에서 피어난 전통 민속인 풍어제, 성신 대제, 마산 오광대 등 생겨나게 되었고 개화기를 맞아 기독교 선교 활동과 함께 서양 음악이 도입되었으며, 문학에 이은상·이일래·이원수·이광래·권환, 무용에 김해랑, 국악에 김애정, 사진에 강신율·남기섭, 미술에 문신·이상갑, 연극에 정진업·김수돈 등 예술인들의 활동을 통해 예술적 토양을 일구게 되었다. 6·25 전란으로 각지에서 모여든 조두남, 김춘수, 이영도, 김남조 등과 지역의 예술인들이 함께 문예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문총 마산 지부, 흑마회, 마산 문화 예술 협의회 등을 결성하여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960년대 들어 중앙의 문총이 분열됨에 따라 1962년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가 탄생하게 되고 1962년 7월 7일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마산 지부의 창립 결성식을 마산 상공 회의소 강당에서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주목한 부분은 1956년·1957년에 발간된 『마산 문화 연감』[2권]인데, 이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 예술의 현황을 수록하여 전국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자료이다. 한편 1956년도에 창설된 마산 종합 문화제는 1960년대 마산 항도제, 대마산 항도제 등으로 명칭을 변경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의 마산 예술제의 모태라 하겠다.
1960년대 이후 마산의 문화 예술이 발전해 가는데 마산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5·16 군사 정변 등 정치적 불안으로 인하여 문화 예술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데 한계가 노출되었다.
일제 36년, 6·25 전쟁 등으로 오랜 문화적 공백기를 통해 민속 문화의 원형과 정체성을 찾는 것이 시급함에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한 경제 건설에 전 국민적인 역량을 쏟아 붓게 되고 그 와중에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민속 문화의 보존 및 전승은 뒷전으로 밀렸으며, 농촌 지역의 전통적인 마을 단위 공동체 놀이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마산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를 통한 문화 예술 활동은 건축, 국악, 무용,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연예, 영화, 음악 10개 장르인데 그 중 건축, 영화는 지역의 열악한 창작 여건으로 인하여 활동이 미미하였으며 연예 분야는 라디오, 텔레비전 등 방송 매체들이 중앙에 집중되었고, 공연장 사정이나 가수 등 연예인들이 자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전무하였다. 국악은 1950년대 중반 국립 국악원이 개원한 이후 마산에서 국악 공연을 간간이 가졌으며 1970년 초 들어 마산 국악원이 개원하여 국악인을 양성하고 연주하는 빈도가 늘어나게 되었다. 무용,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음악 분야는 지역 문화 예술 발전에 대한 예술적 열정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까지 예향의 맥을 이어가는 데 그 몫을 수행하게 된다.
1965년 마산 문화원이 설립되어 미공보원 이후 시민들에게 문화 홍보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여 초창기에는 미공보원에서 넘겨받은 기자재로 영화 상영을 하였고 그 후에 노인 대학, 문화 학교, 전통 혼례식장을 운영하면서 시의 거리 축제를 개최하였으며 최근에는 해안 유속인 성신대제를 복원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75년대 중반 들어 마산 실내악단이 결성되어 1984년 마산 시립 교향악단 창단의 실마리를 제공하였으며 1988년에는 마산 시립 합창단이 창단되어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마산 지역에 100여 개의 문화 예술 단체가 생겨남으로써 문화 예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산의 문화 축제]
구 마산시의 대표적인 축제는 마산 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개최하는 가고파 큰 잔치인데, 1899년 5월 1일 마산항 개항일을 시민의 날로 정하고 매년 5월 1~5월 7일까지 마산 종합 운동장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다양한 문화 예술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음력 8월 17일에는 월영동 만날 고개에서 만날제 행사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고려 말 감천골 윤진사댁 반신불수 외아들과 마산포 이씨댁 장녀간의 혼인에 얽힌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매년 한가위를 지낸 후 시민들이 만날 고개에 모여 만남의 의미를 되새겨 온 풍습을 1983년부터 만날제라는 민속 축제로 발전시킨 행사이다.
마산은 국화의 고장인데, 국화를 소재로 한 축제가 1999년 탄생한 가고파 국화 축제이다. 이 축제는 산업 축제라는 콘셉트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매년 10월 말에서 11월초까지 10일간 열린다. 다륜대작을 비롯한 다양한 국화 작품과 약 60억 송이의 국화꽃이 전시된다. 뿐만 아니라 마산 어시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행사가 마산 어시장 축제이다. 이 행사는 부산의 자갈치 축제를 모델로 하여 어시장을 활성화시키고자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중간에 전어 축제라는 명칭으로도 개최된 바 있다. 아구 데이 축제는 마산 아귀찜을 세계적인 명품 음식으로 홍보하기 위해 매년 5월 9일을 ‘아구 데이’로 정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5년부터 4월에 진동 미더덕 축제, 진동 낙화 불꽃 축제는 진동 광암 해변에서 펼쳐진다. 1993년부터 정월 대보름을 맞아 민속 행사 달맞이와 진동 큰 줄다리기 행사가 열리고 있다.
1989년 마산 국제 연극제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경남 소극장 축제, 전국 소극장 축제로 개최해 오다가 국제 연극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마산을 연극의 메카로 만들고자 하는 열정으로 개최해 오고 있다. 마산 예술제가 매년 10월 문화의 달 행사로 개최되는데 1956년 마산 문화 협의회가 창설한 마산 종합 문화제의 정신을 이어받아 1960년대는 마산 항도제, 마산 대항도제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70년대 중반부터 마산 예총제로 개최하여 오던 행사를 1992년 마산 예술제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50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 외에 장르별 축제로는 3·15 기념 문화제, 바다 예술제, 새물맞이 굿, 단오제, 마산 국제 국악제, 명무전, 가고파 해변 문학 축제, 시의 도시 선포 기념 축제, 마산 여수 미술 교류전, 마산 미협전, 315 미술 대전, 마산 청년 미술제, 전국 세미 누드 사진 촬영 대회, 전국 사진공모전, 전국 학생 음악 경연 대회, 늘 푸른 음악회, 신인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마산의 문화 예술 단체 및 문화 예술 기반 시설]
1951년 문총 마산 지부에 이어 1956년 마산 문화 협의회가 탄생하여 마산 종합 문화제를 창설하고 『마산 문화 연감』을 발간하는 등 문화, 경제, 사회 전반적인 분야의 인사들로 구성되어 전후 지역 문화의 새로운 건설을 위해 매진하였으며 1962년 마산 예총이 탄생하여 지역 문화 예술의 총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1964년 마산 문화원이 탄생하여 해방 후 미공보원이 수행하던 정부의 문화 홍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마산 예총은 마산 문화 회관 건립 운동을 주도하면서 마산 예술제, 가고파 큰 잔치, 문화의 거리 상설 무대, 합포만 여름 축제, 만날제, 송년 예술제, 창동 빈 점포 활용 문화 예술 공연, 시민 예술 문화 대학 운영, 문화 예술 전문 자료관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2005년부터는 문화 예술 교육 국책 사업인 학교 지역 사회 연계 문화 예술 교육 시범 사업, 마산 문화 예술 교육 지원 센터, 사회 취약 계층 문화 예술 교육, 지역 주민 및 영유아 문화 예술 교육 등을 펼치게 된다.
마산 지역의 문화 예술 단체는 1950년대 흑마회, 백치동인 등 수십여 개의 단체들이 생겨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960~1970년대 들어 정치적 불안으로 문화 단체들의 활동이 많이 위축되었다. 1970년 후반부터 연극 분야에서 불씨 극회, 세림 기획, 극단 어릿광대, 멧돌 사랑, 극단 사랑방, 극단 마산 등 생겨나고 무용 분야에서도 이필이 무용단을 비롯하여 정양자, 박성희, 조인자, 정윤정 등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미술, 문학, 사진 분야는 각각 20여 개 단체들이 생겨나 활동하게 되고 음악 분야는 시립 교향악단, 사립 합창단, 소년 소녀 합창단들이 창단되고 수많은 민간단체들이 생겨남에 따라 1980년대는 가히 마산 문화예술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산 지역 공연 시설은 2008년 3·15 아트센터가 건립되기 전까지는 정말 열악하였다. 1960년대에는 3·15 회관, 1970년대에는 경남대 완월 강당, 1990년대에는 경남 학생 과학관, 건축사 회관, 올림픽 국민 생활관 등이 주로 활용되었으며, 전시 시설은 1950~1960년대에는 주로 다방이 이용되었고, 1970년대에는 동서 화랑을 중심으로 한 민간 화랑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라 다방 등의 전시장을 보충할 수 있었으며 1990년대는 성안 백화점·대우 백화점 갤러리를 이용하였으며 2008년 3·15 아트센터 갤러리가 탄생하게 된다.
문화 예술 시설 및 장소로는 3·15 아트센터를 비롯하여 문신 미술관, 마산 음악관, 마산 문학관이 있다. 한편 1989년에 조성된 산호 공원에 전국에서 최초로 조성된 ‘시의 거리’가 있다.
[마산의 문화 예술인]
예향 마산을 일군 문화 예술인은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하겠다.
노산 이은상은 1903년 마산 상남동 출신으로 「가고파」, 「옛 동산에 올라」 등 주옥같은 작품으로 한국 문단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석호 조두남은 평양 출신으로 6·25 전쟁 때 마산에 정착하여 작곡 활동과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문신[본명 문안신]은 조각가로 ‘좌우균제’라는 독특한 예술 세계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김해랑[본명 김재우]은 무용가로 최승희, 조택원과 함께 신무용의 개척자로 헝가리안 댄스, 아리랑, 춘우, 애수의 선자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반야월[본명 박창오]은 마산 완월동 출신으로 「산장의 여인」, 「소양강 처녀」, 「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 4,000여 곡을 작사하였으며 진방남이란 예명으로 가수로도 활동하였다.
국악에 김애정, 무용에 최현·정민·이필이, 문학에 이광래·이일래·권환·이원수·김춘수·김용호·박세익·김수돈·정진업·천상병, 미술에 최영림·이림·이수홍·최운, 사진에 현일영·강신율·남기섭 등 수많은 예술인들이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마산은 20세기 초 신문화 운동이 시작된 후 경상남도를 아우르는 문화 예술의 중추적인 도시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통합 창원시 문화 예술의 뿌리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전통과 문화 예술의 족적들이 미래 창원의 문화 예술을 꽃 피우는데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진해의 문화 예술]
진해는 군항으로 모든 산물이 빈약한 어촌 마을이지만 문화 예술 활동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16세기 경 ‘사기 차완(茶碗)’이 웅천 도요지에서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1930년대 김달진 시인과 『목근 통신』의 작가 김소운도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해는 저 멀리 16세기 경 웅천 도요지에서 막사발의 생산지로 일본인이 국보로 여기는 ‘이도 다완(茶碗)’의 생산지 가운데 한 곳이 아닐까 하는 연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김달진 시인은 『문예 공론』에 「잡영수곡(雜泳數曲)」이 양주동의 고선(考選)으로 등단, 시작 활동을 하였고, 『목근 통신』의 김소운도 「창원 장날」, 「도마 소리」 등 작품을 이곳에서 발표하였다.
진해는 선조가 남긴 문화유산보다 외세의 짓밟힘을 받아온 흔적이 더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쌓은 남산·명동 왜성과 일제가 세운 러시아풍의 우체국도 시내 한복판에 버티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귀환 동포가, 6·25 사변 때에는 피란민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역의 특성상 진해의 문화와 예술은 그간 정체되어 있었다.
편의상 진해의 문화 예술 활동은 196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1962년도에 진해 예총이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1954년도에는 희곡을 쓰던 이기태, 시를 쓰던 이일봉·여태섭·신동석·조영서, 아동 문학을 하는 조유로 등 7~8명의 문인들이 신영토(新領土) 문학 동인회를 결성하여 문학 활동을 하였다. 1957년에는 윤이상의 친구인 정윤주에 의해 태양 다방에서 음악 감상회가 열렸다. 유택렬도 1957년에 자신의 작품 20점으로 태양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는 진해 최초의 미술 전시회였다. 이후 1962년도에 이르러 예술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진해의 문화 축제]
진해는 군항의 특성상 1963년도에 시작한 군항제 행사가 문화 예술 활동의 근간이 된다. 군항제 행사 기간 중에는 ‘진해 벚꽃 예술제’의 일환으로 문인 협회의 백일장, 미술 협회의 사생 대회, 무용 협회의 무용 경연 대회, 사진작가 협회의 사진 촬영 대회, 국악 협회의 국악 경연 대회, 음악 협회의 음악 경연 대회, 연예인 협회의 노래 자랑, 연극 협회의 매년 연극이 진해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주관으로 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세계 군악 대회가 열리고 이순신장군 가장 행렬이 시민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여름에는 진해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가 ‘한여름의 야외 음악회’를 개최하며 가을에는 ‘진해 예술제’를 매년 시행하며 주로 회원들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김달진 문학제’도 가을에 있는데, 김달진의 생가와 문학관을 둘러보고 구민 회관에서는 ‘김달진 문학상’ 시상식에 시극도 열고 시낭송회와 백일장도 연다.
[진해의 문화 예술 단체 및 공연 기반 시설]
1993년에 개관한 진해 구민 회관[공연장 395석, 전시장 약 198㎡, 체육관]에서는 음악, 국악, 무용, 전시, 체육 활동 등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2006년에 개관한 진해 야외 공연장[1,040석]과 전시장[약 500㎡] 시설은 양호한 편이나, 접근성이 떨어져 특별한 행사 말고는 사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두 기관은 진해 문화 센터로 통합되어 창원 문화 재단 내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다.
2005년에는 ‘나래 실버 악단’이, 2010년에는 ‘벚소리 합창단’이 진해 문화원에서 창단되어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진해에 특기할 민속으로는 ‘연도여자 상여’가 있다. 남자들이 메는 상여를 여자들이 메고 부르는 이색적인 상여 소리가 발굴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집을 지키는 여인들이 초상이 나면 장례를 치르면서 부르는 애와 한을 담은 선소리[민요]는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소재가 특이하고 가사 내용이 이색적이라고 평하고 있다.
진해에서 발행되는 문화 예술지로서는 1988년에 ‘이충무공 호국 선양회’가 시작한 『계간 진해』가 있다. 지금은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 이웃집의 고향 소식과 역사와 문화 예술을 알리고 있다. 『진해 문학』은 진해 문인 협회의 연간지로 1990년에 창간되었고, 진해 문화원에서 발행되는 『진해 문화』도 올해로 11호를 맞는다. 『전국 사진 공모전 작품집』과 『미술 협회 회원전』도 발간되고 있다. 그 외 진해 문화 학교와 진해 청년 작가회, 진해 구민 휘호 초대 작가 회원 등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진해의 문화 예술인]
진해의 문화 예술인 하면 떠오르는 이는 김달진 시인과 유택렬 화백이다.
김달진 시인은 1930년대에 시작 활동을 한 지역 예술인으로는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다.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고향에서 향토색 깊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학의 씨를 뿌린 인물다. 그의 시의 지향점은 불교적 사유를 통해 자연을 감각적 외경이나 단순한 즐김의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우주적 현장이자 생의 원리로 사유하게끔 하는 데 있다.
유택렬 화백은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이다. 1954년에 진해에 정착하여 ‘칼멘’이라는 음악다방을 인수하여 ‘흑백’으로 명칭을 바꾸고 문화 예술의 교류의 장소로 만들었다. 이중섭·전혁림 등 화가, 윤이상·조두남 등 음악가, 유치환·서정주·김춘수 시인 등 많은 예술인들이 드나들었고, 미술 전시회와 음악 연주회, 시 낭송회, 연극 공연 등도 수시로 열렸다.
유택렬 화백은 전통적인 토속 신앙 세계를 특유의 미의 의식으로 재구성해 고인돌, 단청, 부적, 떡살, 민화 등에서 한국인의 영혼과 사상을 담았다는 화단의 평가를 받는다.
[의의와 평가]
진해 군항제는 2013년 경상남도 우수 축제로 선정되어 전국에 널리 알려진 지방 문화 축제이다. 초기에는 전국 농악 경연 등 볼거리로 구성이 되었으나 통합 이후 세계적인 축제 행사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창원시의 후원을 받고 있다. 진해 군항제는 다방면으로 알차게 준비한 예술 문화 행사들로 지역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를 제공하여 통합 창원시가 관광과 문화의 도시로 나아가는 데에 기여를 하고 있다.
문화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던 ‘흑백’의 부활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진해의 대표 화가이지만 미술관은 커녕 500여 점에 달하는 유택렬 화백의 작품을 보관할 공간조차 열악한 것이 너무나 아쉽다. 더구나 유택렬 화백은 진해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의 태동과 발전을 함께하여 진해 예술 문화사적으로 가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달진 문학제는 시민과 진해 예술인이 함께 하는 한마음 축제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점차 참여도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월하 김달진의 작품 및 생가 등 문학 콘텐츠를 활용한 관광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기획하여 지역 작가의 뿌리를 유지 계승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진해루’ 야외무대에서는 젊은이 위주의 포크, 록, 랩 등과 노년층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트로트풍의 음악이 함께 어우러져 흥을 돋우고 즐길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다. 생활 예술의 활성화가 우리 지역 예술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고 본다. 현재에 만족하기보다 더 발전적인 예술 문화를 조성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