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0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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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胄承 |
영어음역 | Yi Juseung |
이칭/별칭 | 대재(大哉),휘암(徽菴),은구와(隱求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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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6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거주|이주지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이강년 의진 좌종사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재(大哉), 호는 휘암(徽菴)·은구와(隱求窩). 명문가로 이름 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후손이다. 동생으로 유인석(柳麟錫)의 종사로 활동한 이조승(李肇承)이 있다.
[활동 사항]
이주승(李胄承)[1870~1946]은 선공감 감역관을 지냈으며, 1895년(고종 32) 제천 을미의병 때 가문의 재력과 중앙 및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연고를 동원하여 여러모로 의병을 도왔다. 제천 의진이 충주성을 공략할 때 충주향교의 도유사 이벽원(李壁遠)과 지방대 두령 김성한(金成漢) 등을 시켜 의병에 내응하게 하였고, 권호선(權灝善)·이면재(李冕宰) 등과 함께 청풍 쪽으로 우회하던 신지수(辛芝秀)의 별동 부대를 지원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살던 제천의 한수면 북노리는 제천과 충주 사이에 있어 의병들의 행군로에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후 적의 공격이 심화되자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서울에 파견되어 조정의 고관과 접촉하면서 왕의 영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을미의병이 실패한 후에도 살미면 골운의 토지를 팔아 유인석의 재기를 지원하였으며, 1907년(순종 1) 정미의병 때에도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좌종사로서 수안보 석문리 부근의 토지를 팔아 적극 후원하였다. 만년에는 의병에 관련한 귀중한 문서를 모아서 후대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