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37 |
---|---|
한자 | 金小池 |
영어공식명칭 | Kim Soj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나은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11월 7일 - 김소지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14년 3월 - 김소지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김소지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2월 - 김소지 밀양부흥상업계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978년 4월 30일 - 김소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48년 9월 27일 - 김소지 대통령령 제8호 복권령으로 복권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김소지 대통령 표창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김소지 3·13 만세운동 참여 |
출생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거주|이주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학교|수학지 | 밀양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82-12[삼문동 3-5] |
활동지 | 밀양시 - 경상남도 밀양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밀양부흥상업계 감사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소지(金小池)[1898~1978]는 1898년 11월 7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김덕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밀양면 내일동 186에서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김소지는 1914년 3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하여 간 경성에서 3·1운동이 발생한 것을 목격한 윤세주과 윤치형이 「독립선언서」를 들고 밀양으로 돌아와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실행하는 데 동참하였다.
3월 11일과 12일 윤세주과 윤치형은 정동찬의 집에서 김소지, 권재호, 설만진, 박만수 등에게 지금 각지에서 조선 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니 밀양에서도 시위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소지 등은 3월 13일 성내(城內)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할 것을 서명으로 약속한 후 밀양면·부북면 사무소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독립선언서」를 수천 매 등사하고 대형 깃발, 태극기도 수십 매를 만드는 등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1시경 밀양면 내일동 시장에서 3·13 만세운동이 계획한 대로 실행되었다. 나팔을 교부받은 김소지는 만세를 부르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형 깃발 뒤를 따라 나팔을 불며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운 김소지 외 여러 청년들을 필두로 소형 태극기를 든 군중들이 저마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밀양 주재 헌병과 경찰로는 진압이 불가능하여 부산에서 일본 헌병수비대 병력이 급파되고 나서야 만세 운동은 겨우 진압되었으며 김소지는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주소지는 밀양면 내일동 186번지였으며 나이는 22세였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제7조를 위반한 혐의로 「형법」 제6조·제8조에 의하여 주범[정범(正犯)]으로 처벌할 것이 결정되어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7년 2월 밀양노동야학원이 주최한 남선각희[씨름]대회가 열리자 노동야학원을 위한 동정금을 내거나, 1929년 5월 한해로 인한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밀양에서 열린 구제음악회 및 연주회에서 기부금을 내기도 하는 등 밀양의 사회문제에 참여하였다. 1933년 2월 밀양부흥상업계라는 상무계를 설립하여 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김소지는 1978년 4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김소지는 1948년 9월 27일 대통령령 제8호 복권령에 의하여 복권되었으며 이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