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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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彌勒信仰-聖地-母岳山金山寺 |
영어의미역 | Mecca of Mireuk Belief, Mt. Moak and Geumsan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모악15길 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대 |
[개설]
미륵신앙(彌勒信仰)의 메카인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백제시대에 창건하였고,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 불사 이후 1,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 오고 있다.
후백제의 견훤(甄萱)[867~935]이 유폐되기도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혜덕왕사(慧德王師)[1038~1095]가 중창하였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국 사찰의 구실을 다하였다. 국보 제62호인 금산사 미륵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조 문화재와 조선 후기 목조 건축 등 11점의 국가 지정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문화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찰이다. 현재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모악산의 자연환경]
드넓은 호남평야에 우뚝 솟은 모악산은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 구실을 한 산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과 김제시 금산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노령산맥(蘆嶺山脈) 서단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남평야와 전라북도 동부 산간 지대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 모악산은 ‘엄뫼’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1971년 12월 모악산 일원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암석은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화강암(片麻狀花崗岩)으로, 쥐라기에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의 석영반암(石英斑岩)과 석영 등의 관입을 받아 북동~남서 방향의 함금석영맥(含金石英脈)이 많다.
이 때문에 모악산에는 산금(山金)이 나고, 주변의 금산면·금구면을 흐르는 원평천(院坪川)과 두월천(斗月川)에는 사금(砂金)이 난다. 주능선은 북동~남서 방향이며 지능선이 동과 서로 뻗어 있다. 동쪽 비탈면은 만경강(萬頃江)의 집수역(集水域)으로 계곡의 물은 구이면의 전주저수지로 흘러들어 전주 서쪽을 흐르는 삼천(三川)이 된다.
서쪽 비탈면은 만경강과 동진강(東津江) 사이의 원평천 집수역이다.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북쪽 금구면의 두월천과 남쪽 원평천은 330년(비류왕 27)에 축조된 벽골제(碧骨堤)의 수원이 되었다.
[1,400여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금산사]
1943년 김영수(金暎遂)가 펴낸 『금산사 사적』에 “599년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반포하고,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0명의 승려를 득도시켰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적어도 이즈음에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불교의 오교 구산(五敎九山)의 하나인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본산으로서 일대의 중심 사찰이 된 것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 불사를 한 경덕왕 대 이후이다. 진표율사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에게 가서 승려가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 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왔다.
762년(경덕왕 21) 중창을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마친 진표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主佛)로 모셨고, 금당(金堂)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처럼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금산사는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이후 진표율사는 다시 속리산 법주사에 이어 금강산 발연사를 창건함으로써, 이 세 곳은 미륵신앙의 주처로 법상종의 중요한 3대 사찰이 되었다.
금산사가 다시 한 번 중흥기를 맞은 것은 후백제 견훤의 시대였다. 전주를 수도로 삼은 견훤은 인근 금산사를 원찰로 삼고, 920년대에 금산사 주위에 성곽을 쌓았다. 이때 만든 성문의 잔재가 아직도 절 입구 길가에 남아 있다.
고려 중반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금산사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개성의 귀족 출신으로 이자연의 후손인 혜덕은 막강한 정치적 배경에 힘입어 금산사를 크게 확장하여 3개의 가람으로 구성하였다.
기존 영역은 대사구(大寺區)라 하여 일반 신도들의 예불처로 삼았고, 현재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는 높은 지역에 봉천원(奉天院), 현재 가람 터 서쪽 저지대로 추정되는 곳에 광교원(廣敎院)을 경영하였다. 혜덕은 광교원을 간경(看經)[경전을 읽음]·법석(法席)[법회]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련 장소(章疏)도 광교원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금산사는 대사구 건물 62동, 봉천원 13동, 광교원 11동을 갖춘 거대한 규모였으며, 지금 남아 있는 중요 석물인 석련대·오층석탑·노주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명성을 잃지 않았던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 일대 승병들의 본거지로 지목되어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전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금산사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여했던 승려는 지훈(智訓)·덕행(德行)·석준(釋俊)·천정(天淨)·응원(應元)·학련(學蓮)·태전(太顚)·운근(雲根) 등이었다. 35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드디어 낙성 회향식을 하였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규모에 비한다면 몹시 초라한 중창이었다. 지금의 기본적인 가람 형태는 이때의 중창 결과이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환성 지안대사가 화엄 대법회를 열었는데 1,400명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고종 때에는 주지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다.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86년 대적광전이 다시 불에 타서 이듬해에 전에 정밀 조사를 통해 작성하였던 실측도를 바탕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금산사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僧統) 도생(導生), 원나라 왕실의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해원(海圓)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운 처영(處英)과 서산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던 태능(太能), 편양파(鞭羊派)의 후계자인 남악·태우(泰宇) 등이 머물렀다.
포광(包光)이 지은 『금산사지』에 따르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신라 문성왕 때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和尙) 또는 사주(寺主)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總攝), 1902년에는 섭리(攝理)라고 불렀다.
[금산사의 주요 전각]
금산사에는 대적광전, 성보박물관, 적멸보궁, 삼성각, 조사전, 나한전, 상서전, 하서전, 다각실, 명부전, 만월당, 적묵당, 보제루, 관음전, 향적당, 보현당 등의 전각이 있다.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뒤에 세운 건물이다. 대사구·봉천원·광교원에 있던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년 만에 대사구 지역의 건물을 재건하였고, 봉천원과 광교원은 동북쪽 넓은 지역에 터만 남아 있다.
근년에 월주(月珠)가 주지로 취임한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약 500m 밖에 있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普濟樓)·미륵전·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승당(僧堂)·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하거나 중건하였다.
이 가운데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 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鐵須彌座)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상을 봉안했으리라 여겨진다.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은 금산사에 있는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하였으며,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하던 곳이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 화재로 불타 1992년 복원하였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 정면 오른쪽에 자리 잡아서 미륵전을 장엄(莊嚴)하던 정중(庭中) 목탑이다. 1922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覆鉢)과 보주(寶珠)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대장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迦葉)·아난(阿難)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 1857년(철종 8)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다. 나한전은 방등계단 바로 옆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일주문은 절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1975년 고평용이 건립하였고,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 법요(法要)와 강설당(講說堂)으로 쓰고 있다. 방등계단 앞에 있는 적멸보궁은 1998년에 지었다.
이 밖에도 성렬이 1939년에 신축한 종각과 1940년에 신축한 중향각(中香閣), 1943년에 신축한 칠성각, 연대 미상의 송대향각(送大香閣)이 있다. 1999년에는 금산사 경내의 성보 문화재를 보관·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을 지었다.
[금산사의 국가 지정 문화재]
금산사에는 국보 제62호인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2호인 금산사 노주(金山寺露柱), 보물 제23호인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 보물 제24호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5호인 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보물 제26호인 금산사 석종(金山寺石鐘), 보물 제27호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보물 제28호인 금산사 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제29호인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보물 제827호인 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 보물 제828호인 금산사 석등(金山寺石燈) 따위의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있다.
1.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35년(인조 13)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상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3층 구조로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가장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이다.
2. 금산사 노주
금산사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 서남쪽에 있는 대장각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다. 그 이름을 노주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 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 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 놓았다. 아래 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아래 받침돌 윗면과 위 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 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 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위 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 장식이 있는데, 둥근 받침 부분과 보주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식이다. 절이 창건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3. 금산사 석련대
금산사 석련대는 석조 연화 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 대좌는 흔히 볼 수 있지만 금산사 석련대는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1.67m,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연화대로 한 덩어리의 돌로 조각했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대석·중대석·하대석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석은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는데 석불입상(石佛立像)을 세워 놓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매우 화려하다.
중대석은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하대석 윗면은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각 변(邊)을 따라 10판을 돌려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역동성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옆면은 10각형으로 8면에는 안상을 오목새김하고 그 안에 눈[雪]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2면에는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하였다.
조각 수법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안상 내의 무질서한 배치, 연꽃잎 속의 화사한 무늬나 중대석 안상 내의 귀꽃 등으로 보아 나말 여초인 10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4.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는 혜덕왕사의 생애와 행적, 덕을 기리는 내용을 새긴 탑비로 현재 금산사 부도전에 있다.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1038년(정종 4)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가 되었고, 1095년(숙종 1)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 교리를 강의하였고, 그해에 입적하였다. 숙종은 혜덕을 국사로 대우하여 혜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을 새긴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 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겼고 양쪽 옆면에는 조각이나 장식이 없다. 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비문의 글씨는 구양순법(歐陽詢法)의 해서체로 썼는데,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에 따르면, 비를 세운 것은 혜덕이 입적한 지 15년이 지난 1111년(예종 6)이다. 비문을 쓴 사람은 당대의 명필인 정윤(鄭允)이라는 설이 있다.
5. 금산사 오층석탑
금산사 오층석탑은 금산사 북쪽에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있는 탑이다. 바로 뒤에는 석종 모양의 사리 계단이 있는데, 이렇듯 사리 계단 앞에 석탑을 세운 것은 사리를 섬기던 당시 신앙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상하 2단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의 규모가 좁아져 있고, 각 기단 윗면에 다른 돌을 끼워서 윗돌을 받치도록 되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2층 이상에서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 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6층은 다른 층처럼 몸돌 각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모양을 덮었는데, 이것은 탑의 머리 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으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6. 금산사 석종
금산사 석종은 오층석탑과 나란히 있는 종 모양의 석탑이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판석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형이 범종과 비슷해서 석종으로 불린다.
기단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있어 돌난간이 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를 밖으로 향한 아홉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 계단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7.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은 원래 봉천원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인 대적광전 앞 왼쪽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 데 비해, 육각다층석탑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들었다. 기단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위로 새겼고,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맨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 각 귀퉁이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새겨 넣었다.
지붕돌은 낙수 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 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겼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을 얹었다.
벼루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8. 금산사 당간지주
금산사 당간지주는 금산사 경내 초입에 남북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데, 이 깃발을 다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지주의 기단은 1층이며, 잘 다듬은 6장의 길쭉한 돌로 바닥을 두고, 그 위를 두 장의 돌을 붙여서 마무리하였다. 기단 위로는 당간을 세우는 받침을 지주 사이에 둥근 형태로 조각하였고, 받침 주변에는 고임을 새겨 두었을 뿐 별다른 꾸밈은 없다. 지주는 높이 3.5m로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세로띠를 돋을새김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안쪽 면에서 바깥쪽 면으로 떨어지는 선을 둥글게 깎았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은 각각 지주의 위·중간·아래 세 곳에 뚫었다. 이처럼 구멍을 세 곳에 두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으로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보물 제123호],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6호]에서도 볼 수 있다.
기단부와 당간 받침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지주의 면에 새겨진 조각 수법이 훌륭하다. 우리나라 당간지주 가운데서도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은 금산사의 암자인 심원암(深遠庵)에서 볼 때 북쪽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높이 4.65m로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탑신의 몸돌 네 면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각 몸돌을 덮고 있는 3개의 지붕돌은 넓적하며, 낙수 면의 경사를 급하게 처리하였고, 처마 양끝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각부의 체감률이 작아 안정감이 없으며, 석재의 결구(結構)가 규칙성이 없고 각부의 조각이 섬약(纖弱)하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 있던 탓인지 탑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 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넓은 옥개석과 경사가 급한 낙수 면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0. 금산사 대장전
금산사 대장전은 원래 미륵전을 장엄하는 정중 목조탑이었는데 1635년(인조 13) 재건하고 192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예전의 기능은 없어지고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 지붕 위에 남아 있는 복발과 보주 등은 목조탑이었을 때 흔적이며,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상을 모셨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양쪽 칸에는 1개, 가운데 칸에는 2개씩 올렸다.
건물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우물천장이고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는 정교한 장식 무늬를 조각하였다. 전체 건물 구조와 크기가 비교적 간단하고 작지만 큰 관심을 끄는 변형 건물로, 탑 형식의 목조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11. 금산사 석등
금산사 석등은 대장전 앞뜰에 있는 8각 석등으로 1922년 대장전 이건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높이는 3.9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그 밑에 아래 받침돌, 가운데 기둥, 위 받침돌로 3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었다. 아래 받침돌은 둥근 평면 위에 8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그 위에 세워진 가운데 기둥은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팔각형으로 모퉁이마다 기둥처럼 선을 쳤다.
위 받침돌은 아래 받침돌보다 크고 무거운데, 역시 둥근 평면 위에 8장의 연꽃잎을 새겼다. 화사석은 네 면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창 주위에는 구멍이 3개씩 뚫려 있는데, 창문을 달기 위한 구멍이었던 듯하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작은 꽃무늬를 새겼고, 정상에는 원대(圓臺)를 두고 상륜부를 받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단순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석등으로 지붕돌의 꽃무늬나 석등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모악산 자락이 품고 있는 금산사의 암자]
1. 심원암
금산사에서 동북쪽으로 1.5㎞ 떨어져 있다.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35년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암자이다. 인법당과 산성각으로 이루어진 작은 암자이기 때문에 연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원암 북쪽 0.5㎞ 지점에는 보물 제29호인 북강삼층석탑이 있다.
2. 용천암(龍天庵)
금산사에서 동쪽으로 1.8㎞ 떨어져 있다. 창건 시기는 알 수 없고, 지금의 본당인 관음전과 요사는 1974년에 중건하였다. 산세가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용천암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법당 자리는 용의 혀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한다.
3. 청련암(靑蓮庵)
금산사에서 1.5㎞ 떨어져 있다. 창건 시기는 알 수 없고, 정유재란 이전에는 청사굴(靑社窟)이라고 불렀다. 1959년 극락전과 삼성각, 두 동의 묘사(廟祠)[제사를 모시는 사당]를 지었고, 1962년 대법화보살이 중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