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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245
한자 古沙里
영어음역 Gosa-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진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14.39㎢
총인구(남, 여) 1,045명[남자 505명, 여자 540명]
가구수 507가구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진봉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왕봉산(王峰山) 국사봉 밑에 오래된 절이 있었기 때문에 고사(古寺)라 부르다가 그 후 절 ‘사(寺)’자를 모래 ‘사(沙)’자로 바꾸어 고사(古沙)가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이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소리·석치리·인향리·종야리 일부, 하일도면 남상리 일부, 상서면 하수내리 일부를 병합하여 고사리라 하고 김제군 진봉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만경강(萬頃江)이 서해와 만나는 진봉반도(進鳳半島) 북쪽 해안 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시 옥구읍·회현면과 이웃하고 있다. 해안 구릉지에 고사리에서 가장 높은 나성산[60.9m]이 솟아 있고,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서쪽 심포리봉화산(烽火山)[82m]과 진봉산(進鳳山)[72m]이 솟아 있다. 해안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이며, 멀리 만경읍 능제저수지(菱提貯水池)에서 이어지는 관개 수로를 이용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현황]

2009년 11월 현재 총 507가구에 1,045명[남자 505명, 여자 540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23가구가 빈집이다. 전체 면적은 14.39㎢로 논 6.10㎢, 밭 0.17㎢, 대지 0.30㎢, 임야 0.42㎢, 제방 0.03㎢이다. 진봉면의 중심 마을로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지서, 단위농업협동조합, 정미소, 진봉농업기술센터 등이 들어서 있다. 지방도 702호선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동쪽의 만경읍으로 이어진다.

자연마을로 고사·인향(仁香)·석치(石峙)·석소(石所)·신석소·관기(館基)·평동·신고사, 중앙(中央), 종야(宗野), 옥정(玉井), 농장(農場) 등이 있다. 인향은 고사 동쪽에 있는 마을로 1584년경 형성되었다. 예부터 어진 사람이 많이 나와 마을이 평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의 귀감이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치는 인향 동쪽에 있는 마을로 1525년경 평산신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돌고개를 넘어서 나룻배를 타고 옥구를 왕래한 데서, 마을 이름을 돌고개의 한자 표기인 석치(石峙)라 하였다. 석소는 고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질 좋은 숫돌이 나와 나라에 바치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관기는 진봉면사무소를 비롯한 지서와 단위농업협동조합이 있는 마을로 앞으로 관청의 터가 될 것이라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진봉면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개척한 일본인 다목(多木)이 소작료를 거두기 위해 농장 사무실·창고·정미소 등을 짓고, 거두어들인 소작료로 별장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치안과 안전을 위해 고사에 있던 지서를 이곳으로 옮겼다.

광복이 되어 다목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별장이 비게 되어 1952년 면의회 의원들이 상궐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곳으로 옮겨 오자, 옛 전설이 맞아 떨어졌다고 함방귀씨는 전한다. 한편 마을 주민 김을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이곳 빈터에 쌓아 두어 관터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관기가 되었다고 한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관기(館基)로 적혀 있다.

중앙은 관기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져 있는 마을로 진봉면 전체를 통틀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부(新富)는 1920년경 광활간척지를 조성할 때 간척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중국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대국촌(大國村)이란 마을을 이루었는데, ‘새로 생겨난 부자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종야는 관기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약 500여 년 전 전주유씨(全州柳氏) 중시조 유승혜(柳承惠)가 5대째 독신으로 살던 중 너른 들판을 낀 마을에서 살아야 자손이 번성한다고 여겨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지대가 높아 ‘높은 들’, ‘마루 들’이라는 뜻을 담아 높을 ‘종(宗)’자와 들 ‘야(野)’자를 써서 종야라 하였다.

옥정은 종야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갈대가 우거졌던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샘물을 팠더니 구슬처럼 맑고 질 좋은 샘물이 솟았으므로 옥정이라 하였다. 농장은 종야 남쪽에 있는 마을로 한국농촌연구소장이던 장경순이 이스라엘 키부츠와 같은 시범 농촌을 만들고자 동진농지개량조합에 건의하여, 1969년 협업농장을 만들고 40여 채의 집을 지어 농업고등학교 졸업생 40여 가구가 입주하면서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도 협업농장을 줄여 농장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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