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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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沂 |
영어음역 | Yi Gi |
이칭/별칭 | 이기(李綺),백증(伯曾),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창섭 |
성격 | 실학자|우국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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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
성별 | 남 |
생년 | 1848년(현종 14) |
몰년 | 1909년(순종 3) |
본관 | 고성(固城)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이다. 이기(李綺)라고도 쓴다.
[활동사항]
이기(李沂)[1848~1909]는 30대 중반부터 생활 근거지를 구하여 김제·대구·순창 등지를 전전하다, 44세에 황현(黃炫)의 주선으로 구례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학문과 세무에 뜻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고부로 가서 전봉준에게 서울 진격을 제의한 뒤 남원의 김개남에게 찾아갔으나 그가 이기의 제안을 거부하여 구례로 돌아갔다. 갑오경장 후 상경했는데, 1899년의 거부로 반대로 구례 자택으로 돌아왔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할 때 양지위원으로 충청남도 아산에서 토지를 측량하여 지적과 세정을 바로잡는 체험을 했다.
1905년(고종 42)에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기 위해 도미를 추진하였으나 일본공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대신 일본 동경에 가서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정부 요인에게 서면으로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 추진을 논박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3월에는 나인영(羅寅永)[羅喆] 등 10여 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했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갔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상경하여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간하여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뒤에 자강회원 계연수(桂延壽)·이연보(李延普)·김효운(金孝雲) 등과 함께 단군을 신봉하는 ‘단학회(壇學會)’를 발기하여 종교운동을 벌이려고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실학을 연구하였고,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건창(李建昌)·황현·이정직(李定稷)·왕사부(王師夫), 왕사찬(王師瓚) 형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기는 전통적인 도학자들의 폐습을 절감하고 유학이 공리적이며 고식적인 굴레를 벗고, 보다 실용적이면서 진취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유형원과 정약용의 학풍을 이은 새로운 실학적 풍조를 일으켰다.
학문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할 것을 글자로 표현하는 데 불과하므로, 학문은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칠 수 없고 어디까지나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가르침뿐 아니라 실제로 후생에 이용되는 학문이라면 모두 갖추어져야 하기에 소질에 따라 전공을 할 수 있는 전문대학을 두어야 한다고 했으며,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만민평등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의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묘소]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