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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58
한자 金德明
영어음역 Gim Deokmyeong
이칭/별칭 준상(峻相),용계(龍溪),필상(弼相)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채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동학농민운동가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성별
생년 1845년연표보기
몰년 1895년연표보기
본관 언양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동학농민운동가.

[개설]

김덕명(金德明)의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초명은 준상(峻相), 호는 용계(龍溪)이다. 동학교문에서는 김필상(金弼相)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아버지는 김한기(金漢驥)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며, 동생은 김인상(金寅相)이다. 장남은 김홍구(金洪九)이며 손자는 김병욱(金炳旭)이다.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있다.

김덕명은 금구대접주로서 원평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원평을 호남 지역의 동학 중심지로 만들었다. 후일 전봉준(全琫準)을 동학대장으로 추대하고 수천에 달하는 정예부대를 편성케 한 것도 원평을 중심으로 한 김덕명 관내 교도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활동사항]

김덕명은 1862년까지 글공부에만 전념하다가 이후 세상의 인심을 살피기 위해 자주 집을 떠나 나라를 구제할 길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낡은 질서가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세상 구제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자, 변혁의 뜻을 품고 새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전봉준과는 이웃 마을에 살면서 교류하였다. 전봉준의 외가가 언양김씨로 먼 친척으로 여겨진다.

42세 때인 1886년 김덕명은 동학에 입문하고, 그 해 10월 11일 경상도 상주의 화령 근처에 있는 전성촌으로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도를 받았다. 1887년에는 원평에 동학의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포교에 힘썼다. 최시형은 1888년 전주에 직접 종교적 수도를 지도한 바 있으며, 1891년에는 호남 일대를 순회지도하며 한편으로 육임첩과 전주첩을 차출해 주기도 하였다.

특히 6월에는 태인 산외면 지금실에 있는 김기범의 집에 들려 상당 기간 유숙하면서 지도하였다. 이 때 김덕명김개남 대접주는 최시형의 여름옷을 각각 다섯 벌씩 만들어 주는 등 사제지의를 돈독히 하였다. 1891년 봄 동학에 입도한 전봉준이 당시 김덕명 포(包)에 속해 있을 때 접주의 임첩을 차출 받아 전봉준은 고부접주가 되었다.

1891년 당시 호남 지역의 포 세력 상황을 보면, 산외면 일대와 임실 지역의 김개남(金開南) 대접주, 정읍 일부와 고창 일대의 손화중(孫華仲) 대접주, 금구와 태인 일부 그리고 고부 일부 지역의 김덕명 대접주 등으로 되어 있었다. 주산의 최경선(崔景善)김덕명 포에 속해 있어서, 호남에서는 김덕명 포가 제일이었다. 1892년 11월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삼례집회 때 원평김덕명 포는 교도들을 1만 명이나 동원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893년 김덕명은 보은 장내리 집회에 참가하여 금구포(金溝包)라는 포명과 대접주의 직첩(職帖)을 받았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일으킨 고부민란 이후 각지의 동학교도들은 봉기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3월 21일 김덕명전봉준·손화중·김개남과 함께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동학운동의 횃불을 올렸는데, 이때 오시영(吳時泳)과 함께 총참모가 되어 운동 초기부터 전봉준의 주력을 이루었다. 동학 혁명군은 그 해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자, 전주성으로 직행하여 4월 27일에 완전히 점령하였다. 5월 7일에는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8일에 전주성에서 철수한 뒤, 53개 군현에 동학혁명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군이 무력으로 우리 땅을 강점하자 10월 20일 공주 우금치에서 8천 명의 병력으로 포진하고 일본군과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노성과 논산에서도 패하여 11월 23일 전주를 거쳐 금구 원평으로 돌아온 뒤 약 3천 명에 달하는 혁명군을 재정돈하여 11월 25일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원평 전투의 패전으로 동학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덕명은 이후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 약 1개월간 숨어 있다가 붙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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