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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82
한자 咸台永
영어음역 Ham Taeyeong
이칭/별칭 송암(松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채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조인|독립운동가|정치가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성별
생년 1873년연표보기
몰년 1964년연표보기
본관 강릉
대표경력 제3대 부통령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출신의 법조인이자 독립운동가·정치가.

[활동사항]

함태영(咸台永)의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이다. 1873년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에서 태어났다. 1889년에 아버지 함우택(咸遇澤)이 선략장군행용양위부사관(宣略將軍行龍讓衛副司官)에 제수되자 함께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조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6개월 과정을 거쳐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었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을 때, 사태의 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함태영은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조사한 뒤,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되었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한 면모를 굽히지 않아 집권층의 미움을 받았다. 이로 인해 면관(免官)과 복직이 여러 차례 반복되므로 1910년 공직에서 물러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1919년 함태영은 기독교 신자로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 계획과 거사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직접 참여하고 주도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함태영은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그 중심적 위치에서 3·1운동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은 물론이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선언서를 발송하고 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주요 역할을 하였으나, 민족 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해 달라는 최린(崔麟) 등의 완곡한 부탁으로 인해 33인의 민족 대표로는 서명하지 않았다.

3·1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 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 활동에 힘썼다. 광복 후 강화도에 있는 교회의 목사로 있을 때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알고 청렴결백한 태도를 높이 사서 1942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으로 임명하였다. 1950년 7월에는 한국신학대학장에 취임하였다. 1952년 국회에서 정·부통령의 직접선거제와 양원제를 채택하는 개헌안이 통과된 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 임기를 만료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49년 심계원장으로 있을 때와 1952년 부통령으로 있을 때 고향인 김제를 찾았는데, 당시 “고향처럼 다정하고 반가운 것은 없다.”면서 청년들에게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64년 91세로 세상을 떠나자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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