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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894
한자 林秉律
영어음역 Im Byeongryu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장산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장산리
성별
생년 1891년 8월 30일연표보기
몰년 1935년 4월 13일연표보기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임병률(林秉律)은 1891년 8월 30일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성장해서는 주로 군산에서 활동했는데, 1919년 3월 군산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활동사항]

1919년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와 이두열(李斗烈) 등은 서울에서 내려온 김병수(金炳洙)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의 시위 상황을 전해 듣고 곧 군산의 기독교인 김성은, 개정면의 기독교 병원 사무원 양기준 등과 거사 계획을 협의하였다. 당시 개정면 구암리 기독교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임병률도 이와 같은 계획에 참여하여 만세 운동에 나섰다.

임병률 등은 3월 6일 군산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영명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거사 전날인 3월 5일 계획이 발각되어 거사가 좌절되기 직전에 놓였다. 이에 교사 김윤실과 영명학교 학생들은 긴급 회의를 갖고 그 즉시 만세 시위에 돌입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영명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계통의 여학생이 합류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군산 시내로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도중에 기독교 신도들과 주민들이 합세하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여,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본정 큰 거리에 이르는 동안 시위대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군산 시내의 시민들도 학생들의 거사에 감격하여 행렬에 동참하였다.

학생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배부되고 태극기도 전해졌다. 시위대의 일부는 경찰서로 몰려가서 구속된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당황한 일본 경찰들은 이리 주재 헌병대의 응원을 얻어 주동 인사들을 검속(檢束)하고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임병률은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 1~14(국사편찬위원회, 1970~1978)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익산보훈지청(http://blog.daum.net/iksanbo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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