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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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允喬旌閭 |
영어의미역 | Jeongryeo of Jeong Yungy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212-3[장화2길 164-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용엽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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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212-3[장화2길 164-31]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정윤교의 정려.
[개설]
정윤교(鄭允喬)[1733~1821]의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호는 외암(畏庵)이다. 정윤교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정윤교의 아버지가 윤씨라는 여자가 거짓말을 하여 관가에 불려가 매를 맞고 죽음을 당하였다. 윤씨는 자신의 음탕한 행실이 탄로 날까 두려워 정윤교의 아버지를 이 일에 끌어들여 모면하려는 계산이었다.
이 일을 알고 정윤교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복수하고 자신도 따라 죽으려 했으나 어머니와 두 어린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 그리할 수 없었다. 복수를 결심한 지 16년, 모친상을 치르고 두 아우도 모두 장성하자 윤씨를 찾아가 죽이고 관가에 자수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관가로 몰려가 정윤교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석방을 빌었다. 이에 정윤교의 효성에 감동한 원님이 정윤교를 풀어 주자 가뭄이 심하던 날씨에 갑자기 구름이 일고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정윤교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치]
효자 정윤교 정려(孝子鄭允喬旌閭)는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내부에 정판 2기가 걸려 있다. 편액에는 ‘효자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정윤교지려(孝子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總官鄭允喬之閭)’라고 되어 있으며, ‘금상원년신해(今上元年辛亥)’ 9월 명정(命旌)이라는 기록으로 1851년(철종 2)에 정려가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는 사상적으로 충(忠)·효(孝)·열(烈)을 가장 우위에 둔 사회였다. 고을 수령이 법보다 도덕, 즉 효사상을 우선하여 현명한 판결을 하였고 조정에서도 정윤교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