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228
한자 羅漢明旌閭
영어의미역 Jeongryeo of Na Hanmyeong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옥산동 333[옥산4길 3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진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
건립시기/일시 1653년(효종 4)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옥산동 333[옥산4길 31]지도보기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옥산동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나한명의 정려.

[개설]

나한명(羅漢明)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군탁(君倬)이다. 나한명은 성품이 온화하고 재주와 행실을 고루 갖추었으며 학문이 깊었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후에 계모의 상을 맞아서도 똑같이 지극 정성을 보였다. 아버지가 몸져눕자 변을 맛보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으며, 손가락을 베어 나오는 피를 먹였으나 끝내 돌아가시자 슬픔으로 몸이 상할 지경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날 큰비가 내렸으나 오직 장사 지낼 땅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감동하여 장지에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례 후 3년 동안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정성을 다하였는데, 먹지 못하여 몸이 쇠약해지고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정도였으나 멈추지 않았다. 나한명은 학문에 힘쓰며 착한 일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고,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집안에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효성을 관찰사가 나라에 알려 1653년(효종 4)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위치]

김제시 교동월촌동주민센터에서 나와 김제중앙병원 앞 삼거리에서 시내 쪽으로 오다 보면 왼쪽에 동성주유소가 있다. 여기서 150m 더 가면 오른쪽으로 좁은 길이 나 있다. 이 길로 꺾어져 덕수장 앞을 지나면 진주아파트 후문 오거리가 나온다. 아파트 맞은편인 구산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면 세 번째 집 왼쪽에 구산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길이 있다. 이 길로 들어서서 가파른 고갯길을 타고 오르다 보면 오른쪽 블록 담장 안에 나한명 정려가 있다.

[변천]

나한명 정려는 1832년(순조 32)과 1955년 3월에 다시 지어졌다. 1955년에는 은진 송치규가 지은 것을 여산 송성룡이 옮겼다.

[형태]

나한명 정려는 팔작기와지붕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망새기와는 시멘트기와로 장식되어 있으며, 공포와 겹처마가 건물의 품격을 나타내고 있다. 내부에는 편액이 여러 개 걸려 있다.

[현황]

정려 안에는 ‘효자구산처사나응삼지려(孝子龜山處士羅應參之閭)’, ‘효자증효릉참봉절효나표지려(孝子贈孝陵參奉節孝羅表之閭)’, ‘효자영이당나한명지려(孝子永怡堂羅漢明之閭)’가 있다.

[의의와 평가]

나한명의 정려는 나응삼·나표와 같은 정려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도 한 집안의 효자와 열녀가 같은 정려 안에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나한명나주나씨 집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나표의 정려기를 직접 쓰기도 하였다. 나한명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고, 몸져누운 아버지에게도 효행을 실천하였으며, 아버지 장례 후 무덤 곁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역 정신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