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15 |
---|---|
영어의미역 | Simpo Port and Manghaesa Temple with View Sights of West Sea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심포10길 9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대 |
[개설]
진봉면 심포리 심포항(深浦港)과 망해사(望海寺)는 드넓은 서해의 풍광과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김제시의 중요한 문화적·역사적 자원으로 일망무제한 김제 지평선의 일단을 장식하는 중요한 문화 관광지로 꼽힌다.
[신천강씨 강원기의 심포 이주]
옛 문헌에서 심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지방 지도 등에는 이 지역이 하일도(下一道)로 표기되어 있다. 심포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로, 만경파 시조 강원기(康元紀)의 묘가 “만경 하일도 심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나오는 대로 강원기의 묘는 심포리 뒷산인 진봉산(進鳳山) 기슭에 잘 보존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매년 시제를 지낸다.
강원기는 1398년(태조 7) 이방원(李芳遠)이 왕위 계승 문제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 소생인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이 화를 입었을 때 화를 면하기 위하여 만경현 심포에 정착하여 은거하였다고 한다.
강원기는 중시조인 강지연의 8세손으로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강독 연마하고 심포에 영락와(永樂窩)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두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유집으로 『봉호집(鳳湖集)』을 남겼다. 현재 심포마을에는 신천강씨가 대략 15대째 살고 있다.
문헌상으로 확인할 길이 없지만 강원기 혼자 혈혈단신으로 심포에 들어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고려 왕조에서 가지고 있던 지위로 미루어 보건대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심포에 내려올 때는 아마도 재산은 물론 가족과 노비 등을 모두 거느리고 내려왔을 것이다. 강원기의 심포 이주 시점인 1398년경부터 심포에 신천강씨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마을에 신천강씨가 많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시대 심포의 자연환경]
조선시대 만경현 현령으로 재직했던 김현(金灦)[1593~1653]이 남긴 『만경일기(萬頃日記)』와 일제강점기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발간한 『동진농조 70년사』를 통해 간척 사업 이전 심포의 자연환경을 살펴볼 수 있다.
지금의 심포 모습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된 간척 사업의 결과이다. 그 전에는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진봉산 자락에 약간의 밭을 일구었을 것이고 마을 안쪽 오목한 부분은 빗물만으로 물을 대는 천수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농지가 생기기 전에 심포 사람들의 주업은 바다 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현이 이 지역을 해촌(海村)이라 지칭한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실제 바다 일 외에 이 지역에서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강원기가 심포에 정착하던 시기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농토로 바뀐 드넓은 갯벌]
조선시대에도 원시적인 수준의 간척과 개간은 빈번히 이루어졌으나 그 규모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만조 때 지표면이 해수면보다 약 90㎝나 낮은 심포의 자연환경은 심포 인근에서 어느 정도 원시적인 수준의 간척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간척도 지금과 같은 중장비를 이용한 방식은 아니었다. 물이 빠진 썰물 때를 이용해서 방조제를 쌓고, 바닷물이 밀려오는 밀물 때는 작업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심포 인근의 자연환경은 농지를 조성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밀물 때는 진봉산 인근까지 물이 들어오지만 썰물 때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갯벌과 갈대밭이 드러나 열심히 작업하면 제법 긴 방조제를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심포에 조성된 넓은 농지는 심포 사람들의 생업 환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본래 바다 일이 주업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없던 농지를 경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비록 일본인 지주의 농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이었지만 그럴 땅조차 없는 사람들에 비해서 나은 형편임에는 틀림없었다.
심포에 드넓은 농지가 만들어지자 타지에서 온 이민자들도 늘어났다. 현재 심포에 거주하는 신천강씨 이외의 성씨들이 이주해 온 시기를 조사한 결과 거의 대부분 3대를 넘지 않았고 최초 이주 시기는 1920~1930년대로, 간척 사업으로 농지가 늘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어떤 면에서 심포는 이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드넓은 농지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바다가 가까이 있어서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수입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공적으로 농지를 만든 데 따른 자연환경 변화와 아울러 본래 누리고 있던 바다가 주는 축복은 이민자들이 계속 몰려드는 이유가 되었다.
심포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 지주 다목(多木)의 농지를 경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다목이 운영하던 비료 공장에서 생산한 매우 독한 화학 비료의 이름이 다목비료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현재 심포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에 다목이 정부에서 운영하도록 허가받은 간척지를 경작하다가 광복 이후 유상으로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일본인들이 심포에 들어와서 간척 사업을 하기 전에는 토지를 소유한 심포 사람들이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갯내 가득한 석양의 심포항]
김제의 서쪽 서해와 접한 진봉반도 끝머리에 있는 심포항은 김제에서 그나마 바닷가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다. 김제를 거쳐 부안까지 망망대해로 이어지는 흑갈색의 바다 들판이 펼쳐지고, ‘징게맹게 외배미들’의 누런 들판이 뭍을 덮는다. 심포항 곳곳에 닻을 내린 고깃배, 한가한 횟집 등은 언뜻 보기에 한물간 어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썰물 때면 심포항의 진면목을 드러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심포항의 짭짤한 갯내와 부서지는 파도, 타는 듯 붉은빛으로 바다와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이 비낀 포구의 저녁 풍경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온다. 심포항 서남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는 대나무처럼 생긴 죽합과 왕의 수라상에 올렸다는 자연산 대합이 지천이어서 이 조개 맛을 즐기려는 식도락가들의 발길도 줄을 잇는다.
현재 심포마을과 안하마을 등 221가구 600여 명의 주민들이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데, 갯벌과 서해안에서 잡히는 죽합과 백합, 동죽[꼬막], 꽃게 등이 뛰어난 맛으로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심포마을 동쪽에 있는 남상·남하·석소 세 마을 가운데 남상과 남하는 매년 300여 필의 군마를 길러 조정에 바쳤고, 석소는 칼과 창을 가는 숫돌을 5,000편씩 만들어 바친 역사적인 유적지로 알려진 마을이다.
만경강(萬頃江)과 서해가 만나는 육지의 끝에 자리 잡은 심포항은 이제 새만금 간척 사업의 중심에 서 있다. 다행히 새만금 사업이 완공되어도 만경강 수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곳에 조성될 새만금호를 담수화하지 않고 바닷물을 통수시킬 계획이어서 새만금과 함께 관광의 중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제시는 이곳에 횟집 단지를 조성하여 심포항의 낭만적인 풍경과 각양각색의 수산물, 진봉평야에서 생산되는 맛좋은 지평선쌀을 조화시킨 관광 명소로 만들 계획이다.
[해넘이와 함께하는 심포항 갯벌 체험]
심포항은 붉게 물든 해넘이의 장관과 널따랗게 펼쳐진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갖추어 전국에서 연일 관광객과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2001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우수 축제로 선정된 지평선축제에 조개 캐기 대회 및 체험 코너를 마련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심포항은 전국에서 유일한 특산품인 심포백합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천혜의 양식장에서 3~5㎝ 크기의 자연산 백합이 다량으로 생산되어 심포항 주변 횟집 어느 곳에서든 뛰어난 맛을 즐길 수 있다. 심포백합은 칼슘과 철분이 많고 각종 영양 성분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뜻한 계절엔 횟집의 조개잡이용 갈퀴를 빌려 가족끼리 갯벌에서 직접 조개를 캐서 구워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 조개 캐기 등 갯벌에 대한 추억은 추억으로 변할지 모른다.
[바다 끝, 땅 끝이 한눈에 들어오는 망해사]
해발 72m의 진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망해사는 낙조가 아름다운 절이다. 절이 서해의 섬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있고, 서해의 일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승지이므로 망해사라 하였다고 한다.
망해사 뒷산 전망대에 오르면 서쪽과 서남쪽으로는 일망무제한 푸른 바다가, 동쪽으로는 전국 제일의 곡창인 호남평야가 아련하게 펼쳐진다.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야트막한 야산들 사이로 심포산이 보인다. 심포산 정상에는 고려시대에 축조한 봉수대가 있다.
망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754년(경덕왕 13) 통장법사(通藏法師)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642년(의자왕 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1073년(문종 27) 심월(心月)이, 1371년(공민왕 20) 지각(智覺)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 들어 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폐허가 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창하였다. 진묵은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이적을 남겼는데 그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그 뒤 승려 관준(寬俊)[1850~1919]이 중창하였고, 1915년에는 계산(桂山)이 중창하였다.
1933년 주지 김정희(金整禧)가 본전을 중수하고 보광명전(普光明殿)과 칠성각 등을 신축하였고, 1977년 남파(南坡)가 요사(寮舍)와 망해대(望海臺)를 새로 짓고 보광명전·낙서전(樂西殿)·칠성각(七星閣) 등을 복원 중수하였다. 1984년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헐고 그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1986년 낙서전을 해체·복원하였다. 1989년 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1년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1989년 요사인 청조헌(聽潮軒)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망해사의 주요 문화재]
1. 망해사 낙서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이다. 망해사 낙서전은 조선 선조 때 진묵대사가 지었고, 1933년과 1977년에 고쳐 지었다. 팔작지붕의 ‘ㄱ’자형 건물로 앞으로 한 칸은 마루를 놓았고 그 위에는 최근에 만든 종이 걸려 있다.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원래 법당 겸 요사로 쓰였음을 짐작케 한다.
기단은 본래 자연석이었으나 최근에 보수하였고, 초석은 자연석·각형·원형이 함께 쓰였다. 기둥은 부정형 자연목을 깎아 세웠으며, 단청은 퇴색하여 산만해 보인다. 더욱이 마루와 벽체 일부분을 보수하여 건물의 본래 모습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 올린 익공 양식으로 꾸몄고, 창방과 주심도리는 별다른 장식 없이 기둥 사이에 각각 1개씩 둥근 화반(花盤) 대공과 접시소로로 결구(結構)하였다.
2. 망해사의 팽나무
전라북도 기념물 제114호이다. 낙서전 앞과 왼쪽에 각각 1그루씩 있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낙엽 교목으로 높이가 20m까지 자라며, 우리나라와 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망해사의 팽나무는 조선 선조 때 진묵대사가 지은 낙서전과 역사를 같이한다고 전하고 있어, 수령은 400년이 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낙서전 앞 10m 거리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 21m, 동서 가지 길이 24.8m, 남북 가지 길이 22m로 안정된 수관을 형성하고 있다. 낙서전 왼쪽 15m 거리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 17m, 동서 가지 길이 16.7m, 남북 가지 길이 17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