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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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의미역 | Roman Catholicism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용엽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가톨릭 교회.
[개설]
김제 지역의 천주교는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후인 1879년(고종 16) 드게뜨 신부가 금구 배재에서 잡혀 추방되었다가 1881년(고종 18) 뭬렐 신부와 같이 재입국하면서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 혁명 후에는 말세로구 신부가 와서 금구현 수류면[현 김제시 금산면]에 있던 전주 이진사의 재실을 구입하여 성당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 후 배 신부가 후임으로 와 48칸이나 되는 성당을 착공하여 1907년에 완공하면서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에 수류본당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 천주교 전파자 유항검]
전라도에 처음 천주교를 전한 유항검(柳恒儉)[1756~1801]은 전주부 초남리[현 완주군 이서면 반곡리 초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동근(柳東根)이요, 어머니는 권기징(權沂懲)의 딸이다. 유항검과 함께 전주의 천주교 발전에 힘쓴 사람이 그의 이복동생 유관검(柳觀儉)이다. 유항검의 가문은 널리 알려진 남인 양반이었다. 그러나 당시 왕년의 영화를 찾을 길 없어 한미한 향반이 되었으나 재산은 많아 정부 관리가 표현한 대로 억만금의 소유자였다.
유항검의 전장(田莊)은 현 김제시 용지면과 순창, 무주, 익산, 여산 등지에 널려 있었다. 그 중 가장 넓은 토지가 김제시 용지면에 펼쳐져 있었으므로 유항검은 김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유항검은 금구향교에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으므로 그렇게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막대한 재산에다 양반의 신분이었기에 일찍부터 과거를 준비하였다. 남인이었기 때문에 누대 전부터 정권에서 밀려났으나 과거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고 형 유익검이 진사에 합격한 후 유항검 자신도 응시했으나 여러 번 실패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경기도에 거주하던 권일신(權日身)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이것이 이후 유항검의 인생 항로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권철신(權哲身)·권일신 형제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권철신 형제는 당시 처음으로 조선에 터전을 잡으려 했던 천주교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유항검은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영세까지 받은 뒤 신부가 되고 전라도의 전교 책임자가 되어 하향하였다. 이때가 1785년(정조 9)이었는데 한국 천주교의 창설은 이보다 1년 빠른 1784년이었다.
한국에 맨 처음 천주교를 세운 사람은 이승훈(李承薰)이었다. 이승훈은 학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전해진 천주교 서적을 접한 후 이동욱을 따라 동지사행의 일원이 되어 베이징에 가서 서양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1784년 봄에 돌아왔다. 이때를 한국 천주교 창설로 보고 있다. 이승훈은 귀국해서 반촌의 김범수 집에서 예배를 보며 비밀리에 남인 학자들인 이벽, 권일신,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김범우, 최창렬 등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것이 곧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과정이다.
이승훈은 자신이 주교가 이벽, 권일신 등 앞의 인물들과 전라도 책임자 유항검과 충청도 책임자 이존창(李存昌) 등을 신부로 임명하였다. 이를 가성직단(假聖職團)이라 부르며 신부가 아닌 이승훈이 성사를 집행하고 신부를 임명할 권한이 없음에도 그렇게 한 예는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영세를 받은 후 곧 본가로 돌아와 열심히 전도하였다. 먼저 진산에 살고 있는 이종사촌 윤지충을 전도하였다. 그리고 정약용과는 고종 사촌간이 되었다. 즉 유항검의 고모가 정약용의 어머니였으므로 윤지충이 정약용 형제로부터 먼저 전도를 받았을 가능성도 높다.
실제로 윤지충은 형 정약종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그러나 유항검이 전라도 담당 ‘탁덕[당시 신부를 이르던 말]’이 되었고, 윤지충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펼쳤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항검이 윤지충에게 천주교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윤지충도 외종 사촌인 권상연과 한덕운 등 많은 사람에게 전도했으나 전도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유항검에게 전라도를 책임지게 한 것은 그의 열성, 재산, 덕망, 그리고 전라도 수부인 전주에 거주하는 점 등 여러 면으로 볼 때 이상적인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항검을 통해 전라도에 천주교가 크게 전파되었음은 “우선 유항검은 자신의 가족과 방대한 식솔부터 전도하였으니 그의 어머니, 아내[신희], 네 아들[중철, 문석, 일석, 일문]과 두 딸, 그리고 동생 관검 부부 및 조카 중성 등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한 전라도감사 김달순(金達淳)의 장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천주교 역사의 성지 수류성당]
수류성당은 1889년 봄 배재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10월 성당을 이전하고 수류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초대 신부로 베르모렐 요셉 신부가 부임했으며 1889년 베르모렐 신부가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에 설립한 배재본당은 수류본당의 모태가 되는 본당이다. 배재본당의 전신인 배재공소는 1882년 리우빌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후 베르모렐 신부는 전라도 남쪽 지방 공소들의 판공성사(判功聖事)를 돌보아 주는 과정에서 다른 공소의 가운데에 놓여 져 있던 배재공소로 거처를 옮겼고 배재공소는 곧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894년 갑오 농민 혁명으로 2대 주임 조조 신부가 살해되고 3대 라크루 주임신부가 부임하면서 면소재지가 있는 수류로 성당이 이전됨과 더불어 수류본당으로 개명되었으며 1901년 10월 1일에는 드망즈 신부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6·25로 예전 건물은 모두 불타버리자 그 자리에 지금의 성당을 세워 약 50여 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축물이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에 전파된 천주교 100년의 역사를 말해 주는 성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근처에는 금산사, 귀신사, 청룡사 등의 유명한 사찰과 정여립(鄭汝立)의 생가 터가 모두 10여 분 거리 안에 있고 증산교, 용화교 등의 흔적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