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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구미란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87
한자 院坪-龜尾卵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Wonpyeong and Gumir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894년 11월 25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4년 11월 27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전봉준|김덕명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전투.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뒤 조선 정부가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이자 동학농민군은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1894년 9월에 다시 일어나 북진하였다. 10월 하순에 주력부대는 논산에서 합세한 다음 공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고 시도하였는데, 농민군의 논산 집결 소식이 정부에 보고되자 관군과 일본군이 출동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화력의 절대 우세를 앞세워 우금치 등에서 동학농민군을 대파하여 농민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목적]

동학농민군 주력부대 1만여 명 중 생존한 500여 명의 병사들이 전주·태인을 거쳐 후퇴하면서 재기를 꾀하기 위해 금구·원평 일대에서 부대를 정돈하고 일본군 및 관군과 맞서고자 하였다.

[경과]

원평구미란 사이에 위치한 구미산(龜尾山)에 진을 친 농민군의 패잔병은 1894년 11월 25일에 원평에 들어온 일본군 지대와 이에 배속된 관군 교도중대에 맞서 산의 삼면을 지키며 ‘品’자 형을 이루어 방어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전장을 향해 진군한 일본군과 관군은 원평천 변에 진을 치고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오후까지 동학농민군을 난타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지형상의 이점을 누리고 있었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결과]

동학농민군은 11월 27일까지 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다. 원평삼거리의 점포와 민가 40여 호가 불탔고, 군량미와 가재도구도 함께 소실되었으며, 일본군과 관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37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농민군 사망자 수는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는 그 수를 훨씬 상회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패퇴하던 중에도 잔존 병력을 계속 재정비하며 일본군과 관군을 괴롭혔으나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패배한 후 더 이상의 대규모 전투를 벌일 능력을 잃고 흩어져 각자 재기를 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제신문』 (1999. 4. 12)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김제권의 동학농민혁명(http://donghak.go.kr/historic/index.asp?gubun=sub2_1_8&option=gim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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