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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1787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Rul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대

[정의]

1910년 한일병합으로부터 1945년 8·15 해방에 이르는 기간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의 역사.

[개설]

한일병합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사건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 또는 일제병탄(日帝倂呑)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융합한 악랄한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식민 통치 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후 최고 책임자인 조선 총독을 육군이나 해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군통수권뿐만 아니라 행정·사법·입법권까지 행사하도록 하는 군사 방식에 의한 무단 통치를 자행했다.

[지방 행정 구역 재편]

1914년 일제는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을 식민 통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재편성하였으며 현재의 행정 구역의 원형은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김제시가 위치했던 지역은 조선시대의 김제군(金堤郡)·금구현(金溝縣)·만경현(萬頃縣) 등 3개의 독립 군현이 있던 곳이다. 지금의 김제시 중심 시가지와 백산면·용지면·백구면·죽산면·부량면은 옛 김제군 지역, 금구면·황산면·봉남면·금산면 일대는 옛 금구현 지역, 만경읍·진봉면·성덕면·청하면·공덕면 일대는 옛 만경현 지역에 해당한다.

1895년 지방 제도 개편으로 김제군·금구현·만경현이 모두 군이 되어 전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북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하여 금구군·만경군이 병합되어 17개면으로 조정되다. 본래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넓은 평야지대였지만, 20세기 초 간석지에 대규모 방조제를 건설하여 광활한 미작 농경지를 확보하였다.

1915년 진봉방조제, 1923년 동진방조제[지금의 광활방조제]를 건설하여 새로운 농경지와 취락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1949년에는 진봉면을 분리하여 광활면을 신설했다. 1931년 김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35년에는 하리면이 봉남면, 쌍감면이 황산면, 수류면이 금산면으로 이름이 각각 바뀌었다.

[경제 수탈 정책]

일제는 토지 약탈과 식민지 착취를 위한 토지 조사 사업을 1910~1918년까지 실시하였다. 이는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 제도를 강화하여 일반 농민과 소작농의 경제적인 처지를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1920년 이후로는 일본 국내의 부족한 쌀을 보충하기 위한 산미 증식 계획도 장기간에 걸쳐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식민지 조선은 항상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려야 했으며 김제 지역에서도 가장 드넓은 금만평야에서 수집되어 일본으로 유출된 쌀의 양이 전국적인 규모였다.

일제는 자국 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풍요로운 김제땅을 침탈하였다. 특히 쌀 생산 증대를 위해 수리 시설 확충과 수리 조합 결성, 수자원의 체계적인 관리·개간·간척 등을 다각적으로 진행하였다. 1925년 일제가 결성한 동진수리조합에 의해 김제 면적의 2/3 정도가 관개(灌漑)되어 관리가 이루어졌다.

또한 죽산면 하시모토농장, 김제읍 이사카와농장 등 일본인 지주가 경영하는 농장이 등장하면서 당시 소작농이었던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쌀 생산 증대를 꾀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강제 수탈은 금만평야를 무대로 한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잘 드러나 있다.

[교육 정책]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1911년 8월 제정된 「조선교육령」으로 시작되었으며,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기본 취지는 일관되게 식민 지배에 복종하는 ‘충량(忠良) 신민(臣民)’ 육성에 있었다. 주요 골자는 일본어 보급 확대, 실업 기능 교육 강화, 대학 교육 불인정 등이었으나 이마저 교육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특히 초등 교육의 경우 만성적인 입학난을 초래하는 등 제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3·1운동 이후 학령 아동 구제와 ‘조선인 본위교육’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지면서 김제 지역에서는 만동학교·채운학원·영화여학교·노동야학·부녀야학 등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 교육 기관은 학생들의 민족정신 배양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야학은 학령 아동뿐만 아니라 단체 회원들의 문맹 퇴치와 교양 함양 등 지역민의 지식 계발에도 크게 기여하여 지역민들을 각종 사회 활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물산 장려 운동이나 금주 단연 운동은 이러한 배경과 맞물려 전개된 것이었다.

한편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이미 1908년 김장호(金漳昊)에 의해 현 치문초등학교의 전신인 신명학당(新明學堂)백구면에서 설립되었으며 김제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삼성학교도 설립되었다. 1910년에는 이낙조(李樂祖)가 사립 호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1년에는 현 김제여자중학교김제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김제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민족운동]

강제적으로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를 통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식민지 지배 체제를 확립시키려 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한국인들은 이전에 이미 항일 투쟁을 전개해 왔으나 일제의 침략을 물리칠 수 없었다. 더욱이 합병 후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 체제의 확립은 항일 투쟁을 표면상으로 더 이상 강력하게 전개시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시기의 항일 독립 운동은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전개되었던 정신을 계승하고 거족적인 3·1운동의 기반을 닦는 잠재적인 시기였다. 토지 침략 등 한국인 각 개인에 이르기까지 대일 감정은 더욱 쌓여지는 시기였다.

대일 감정과 독립 주권의 회복을 염원하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아울러 윌슨 대통령이 부르짖은 약소민족 독립 자결 원칙이 고창 되어 그 영향을 받아 우리도 독립 주권의 회복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3·1운동은 민족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국을 진동시키고 또 세계 여론에도 호소가 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김제 지역의 3·1운동도 가열 차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일 김제읍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 선언서가 도달되어 교구장 공문학은 교인들을 통해 죽산면·부량면 등 각 면에 배포했고, 인근 마을에까지 전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3월 4일에 김제역 대합실에서 독립 선언서 20장 1꾸러미가 발견됐고, 3월 6일에는 김제읍에서 독립 선언서가 거리에 산포되고 운동이 진행되려 하다가 일제 측에 의해 미연에 방지되었지만 산발적인 독립 운동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3월 20일 오후 금산면 원평리 원평장터에서 주민들과 장사꾼 수백여 명의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원평장터에서의 독립운동은 김제·만경 지역과는 다르게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수류면 구월리의 청년 배세동은 13일 전주읍 시장에서의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수류리에서도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3월16일에 같은 마을 전도명, 전도량, 전부명, 이완수, 김성수 등과 함께 3월 20일 원평 장날에 맞춰서 만세 운동을 결의하고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 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누설되어 익산 주재 헌병 1개 중대 100여 명이 투입되어 몸수색과 도로 차단을 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같은 날 오후 6시 헌병대가 퇴각하고 경계가 느슨해지자 산에 숨어있던 농민들은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로 나와 장터의 장사꾼과 아낙네들 모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헌병들의 무력 제지에 의하여 군중은 해산되고 배세동 등 주동자 10여 명은 체포당해 6개월에서 1년의 강제형을 당했다.

원평장터에서의 독립 만세에 이어 4월 4일에는 만경 장날에 맞추어 만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있었다. 같은 날 정오 교사 임창무가 3·4학년 생도 전부를 교정에 모아 놓고, 독립의 타당성을 생도들에게 설명한 후 생도들을 격려하고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생도 100여 명이 대열을 지어 시장으로 나가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러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비록 순찰 중이던 순사와의 승강이가 있었지만 한참 동안을 시장을 돌며 시위 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제경찰서의 무장대가 출동하여 폭력으로 제지하자 대열은 해산되고 임창무 등 주동 인물들은 구속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김제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보다 더 관심이 되는 것은 독립 운동을 주도한 9명중 8명이 한 마을에 살았고, 이들이 보여준 행동은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금산면 원평리 어율마을 당시 어율마을은 40여 호가 천수답에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 대다수가 동학 농민군의 후손들이었고, 특히 만세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배세동을 제외한 전도명, 전부명, 이병섭, 전천년, 이완수, 고인옥, 김성수, 이병태 등 8명이 한 마을 출신이었다. 만세 운동으로 9명이 체포된 후 조선 총독부 광주지법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과 1년의 실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수감 생활 중 일제는 억압과 핍박을 가족에게로 돌렸고, 주민들에게는 이들 가족의 일을 돕지 못하게 했지만 어유마을 사람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장이 부재해 있는 이들의 농사를 대신 지어주며 가족들을 돌봤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일제의 핍박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 행동을 어유마을에서 실행하면서 또 다른 일제의 만행에 항거를 했다. 이 같은 마을 주민들의 헌신적인 행동과 만세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1989년에는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가, 1990년에는 ‘어유동 농민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졌다.

또한 항일 투쟁을 몸소 실천한 많은 애국지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장태수신명학교를 창설하여 배일사상을 함양하였으며, 이기는 1907년 나인영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리 중국 만주 등지에서는 정화암, 이종희 등이 독립 투쟁 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김제청년회가 조직되어 청년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각종 소장 쟁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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